의존과 회피
학과에 불만을 잠시 뒤로하고, 나는 어쨌든 H와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나는 내 공허한 마음과 불안한 감정을 조금씩 H에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달래고 싶어했다. 끌어안은 스무 살의 상처는 깊숙히 숨겨놨지만 조금도 아물지 않았으며 썩어들어가는 통증은 나를 안에서서부터 망가뜨리고 있었다. H는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H와 내가 동류라는 사실을.
H가 뛰어난 공감능력을 발휘하거나 진지히고 어른스럽게 나를 보듬어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H는 매우 불안정하고 미성숙한 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H의 눈치를 보며 기분을 풀어주고 달래주는 것은 나의 역할이 되었다. 나중에 서현이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유독 H 앞에서만 어쩔 줄 몰라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내가 H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고 했다. H의 감정기복과 불안한 감정은 어머니의 것과 닮았다. 그건 나를 망가뜨리는 동시에 그 어린 시절의 지옥에 대한 나의 향수를 달래주었다.
내 신입생의 추억이 전부 H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함께 꽃을 보고 집앞 문턱에 앉아 밤이 되도록 떠들었으며, 서로의 집을 들락거리고 휴대폰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었다. 밤새 전화를 하며 추운 날씨에도 거리를 걷고 굳이 붙어있었다. 함께 지낼 미래의 학교생활에 대해 말하고 서로의 아픈 이야기를 드러내며 끌어안고 눈물을 닦아주고는 했다. 시험기간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척 책을 펴두고 서로의 손과 노트에 낙서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 관계가 나를 한 번 더 망가뜨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H를 잃는 것에 대한 불안에 시달렸다. 그 불안은 역설적으로 내가 H에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도록 붙잡는 족쇄가 되었다. 좋아하는 마음보다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건 내 인격의 본질이었다. 진심을 담은 애정은 텅 빈 마음이 내뱉는 결핍의 그림자와 섞여 짙은 잿빛을 띠었다. 나는 종종 그런 내 약점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고는 했다. 그런 내 행동에 지쳤던 건지, 어느 순간부터 H는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