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처음이었다
나는 검은 목티 위에 버건디색 셔츠, 베이지 슬랙스를 입고 집을 나섰다. 본관 건물 행사장의 중앙 즈음에 태강이, 그리고 개강총회 자리에서 만났던 다른 동기들과 함께 앉아있었다. 교수님들이 직접 방문하셔서 우리의 기수환영식을 축하해 주시고, 학생회에서 제작한 영상을 시청하였다. 그리고 학식당 3층에서 식사를 한 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때 서현이의 소개로 H를 만나게 되었다. H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녀가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기에 구분하기 쉽게 할 필요가 있고, 또 그럴듯한 가명이 생각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어쨌든 H의 첫인상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흔하게 생긴 얼굴에, 평범한 옷차림. 그때까지만 해도 H와의 이야기가 그렇게 길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잠시 서로를 쳐다보고 안면을 튼 후, 나는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찍어주며 남은 휴식시간을 보냈다.
2부의 준비를 위해 기수운동복을 나누어 받고 다시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나는 전날 신청을 통해 장기자랑을 준비해 간 상태였다. 땅을 치며 후회한다. 그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조금은 조용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름 순으로 조를 편성한 탓에 나는 1조에서도 가장 첫 번째 순서였고, 1분 30초 정도 <closer>이라는 팝송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아직도 그 영상이 학과 내에서 돌아다닌다는 소문도 있다. 그 이후에도 재미있는 장기자랑과 자기 어필이 이어졌다. 이는 선배들에게 ‘기수환영식 때 ~한 애’와 같이 나중까지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기수환영식이 끝나고, 번호교환 행사가 있었다. 낯이 익었던 선배 몇 명에게 번호를 받은 후 각자 짐을 싸서 해산하였다. 공식적인 뒤풀이는 없었지만 동기들이 사람을 알음알음 모아 함께 술자리를 하기로 하였고, 나는 H와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럭저럭 즐거운 기분. 한껏 꾸민 신입생이었던 우리들. 약간의 설렘과 불안. 그런 감정들이 녹아있는 술자리였다. H는 내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이성적으로도, 한 명의 사람으로도. 번호를 주고받고 친하게 지내자는 형식적인 듯 하지만 순수한 마음이 오갔다. 다시 한번,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전보다 많은 동기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게 되었다. 나이 많은 n수생, 해외에서 오래 지내다가 입학한 재외국민 전형 동기들, 같은 고향 출신인 사람들도 있었다. 술기운 때문에 몸에서 조금 힘이 빠져 피곤했지만 그것까지도 좋았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는 H가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