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04
런던에서 두 달간 지낸 첫 숙소에서 드디어 이사를 간다. 결코 즐겁지만은 않은 날들이었다. 어둡고 축축한 런던의 날씨는 내 생활패턴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매일 운동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유지하던 몸과 마음의 건강도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샘과 세레나는 좋은 사람들이지만 생판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본 지 너무나 오래된 나는 어색하게 선을 긋고 최대한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세레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사적인 일들 까지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빠져나가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움켜쥐고 써야 하는 나는 그걸 피하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4존인 Woolwich는 내가 사는 Woolwich Arsenal역 주변과 템즈강변인 Woolwich역 주변이 도로를 경계로 나뉘어 있다. 이쪽엔 유색인종, 특히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주로 살아서 거리를 걸으면 나 같은 아시안은 찾아보기 힘들다. 길 건너편에는 리버뷰를 가진 모던한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있고 백인들과 아시안들이 적당한 비율로 섞여 커피를 손에 들고 강아지를 산책시킨다. 10년 전에 런던의 주요 관광지를 여행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도시의 경계를 이곳에 살면서 발견했다. 싸구려 냉동식품을 먹으면서 운동을 하지 않으니 몸이 불어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월마트에서 냉동식품과 캔으로만 가득 채운 카트를 끌고 간신히 걸음을 떼던 수많은 고도비만 환자들이 생각난다. 영국에서도 역시 내가 장을 보는 슈퍼마켓의 이름이 사회적 계급이 된다.
내가 두 달을 산 다세대 아파트의 외관은 재개발도 실패해 방치된 80년대 공공임대아파트처럼 을씨년스럽다. 파란 철문이 입구마다 서있는 것이 교도소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살기에는 보안이 철저하고 엘리베이터가 있고 (런던의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집도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불평할 것이 없었다. 2층의 내 방에는 큰 유리창으로 공원이 내다보여 답답하지 않았고 복층구조로 분리된 거실과 주방이 따로 있는 것도 좋았다. 게다가 12월 초에 세레나와 샘이 한국으로 긴 휴가를 가게 되어 한 달이나 이 집을 혼자 쓰게 되었으니 운도 좋았는데 그럼에도 내 무기력은 좀처럼 복구되질 않았다.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계속해서 나를 구속하고 생활반경은 자꾸만 좁아졌다. 억지로 나가지 않는 이상 밖에 나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느낌은 런던의 느낌일까 아니면 이 동네의 느낌일 뿐일까.
어쨌건 어딜 가도 이방인인 삶을 자초해 살고 있으니 앞으로 세 달 동안 머물게 될 새 집에서도 불편함은 완전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느낄 수 있는 감정의 모든 모서리마다 마음을 몰아세우며 이것들이 터져 나오는 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