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기행, 신윤복의 '월하정인'을 떠올려본다.
오래전 달빛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전주의 경기전에서 달밤에 차를 우리고, 벗들과 차를 마시며 보낸 밤의 시간이 있었다.
깨지기 쉬운 다기들을 정성껏 포장하고 찻물을 담은 보온병과 그날밤 우려낼 차를 골라 가방에 한가득 챙겨 경기전에 찻자리를 폈던 그날들.
한복을 곱게 챙겨 입고 차를 우리는 밤은 그저 좋았던 한 시절의 풍류였으니.
그때 마련한 한복이 상자에 담겨 선반에 올려져 있다.
어느 땐가 한 번쯤 챙겨 입어보고 싶었던 한복을, 같은 달빛기행이지만 내용도 장소도 다른 이 밤에 나는 차려입고 나섰다.
딸아이에게 부탁해 미리 예매를 해 두었던 날이 왔다.
창덕궁 달빛기행.
밤 8시에 창덕궁의 금호문에서 궁으로 들어선다.
더운 여름 날씨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저녁 바람은 선선하고 하늘에 반달이 제법 환하다.
아이와 손을 잡고 금천교를 건넌다. 세속과 구별되는 곳으로 들어가려면 건너야 하는, 마치 사찰의 일주문 같은 상징적 장치라고 해야 할까.
이날 나는 몇 개의 문을 들어서고 나왔는지, 각기 나름의 의미를 가진 문의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치를 하는 이가 이루고자 했던 지점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금호문, 진선문, 인정문, 숙장문, 어수문, 불로문, 장락문.
밤의 풍경은 낮의 것과는 또 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가려주고, 드러내 보여주는 빛의 인심에 따라 발길이 다가가고 머문다.
프로그램은 세심하게 준비되었고, 밤의 창덕궁은 아름다웠다.
상량정에서 짧지만 인상적인 대금산조를 감상하며 궁밖으로 시선을 돌려 저 멀리 남산타워까지 바라보며
오래전 주인을 잃은 궁궐의 공간에 머물러본다.
부용지에 다다르자 눈이 황홀하다.
밤풍경은 반영이 있어야 더욱 빛난다.
쌍을 이루며 대칭으로 반짝이는 저 한옥건축의 아름다움이 소쩍새 울음소리와 어울린다.
마치 먹으로 그린 사군자 옆의 시구절처럼, 원래 한쌍이었던 것같이.
비원의 숲에서 별을 보고 소쩍새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떠나온 그곳, 저 멀리 남쪽의 지리산생각이 간절하다.
규장각을 본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았던 외규장각 전시실이 그려진다.
오랜 시간 타국에 머물다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물론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되었지만 규장각을 마주 바라보며 외규장각의궤가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
실용적이고 개혁 지향적이었던 정조의 지식과 정치의 산실이었던 규장각, 단순히 왕실의 도서관만은 아니었던 곳.
이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의 위층은 '주합루'라는 누각, 책 읽기 참 좋은 곳이구나 싶다.
요즘 경관 좋은 도서관이 많은데 이곳이 원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규장각 건너편에 마주하고 있는 자그마한 정자, 부용정 사랑스럽다.
부용지에 하얀 눈이 내리는 날, 연못은 얼어 있고 그 위로 하염없이 눈이 쌓이는 날.
소리도 없이 눈이 내리는 고요한 어느 날에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부용정 정자에 오르고 싶다.
사방으로 난 문을 열어 조용히 혹여, 눈 내리는 소리 들릴까 귀 기울이고 앉아 있고 싶다.
바람은 자고 겨울나무의 가난한 가지들 위로 눈이 얼마큼 쌓이면 나뭇가지들이 부드럽게 휘어지는지 보고 싶다.
배고픈 산새 한 마리 연못 위로 날아들면 옆으로 불러들여 같이 눈 내리는 밤 지새워보자 할까.
애련정을 만난다. 가냘픈 두 다리를 연못에 담그고 있는.
연꽃이 올해는 몇 송이밖에 피지 않았다고.
돌아보니 올래 연꽃을 보지 못했다.
처음일 거야, 연꽃의 향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여름을 보내고 말다니.
너른 연지에서 맘껏 연꽃에 얼굴을 파묻고, 연잎을 얻어 연잎밥을 지어 나누고는 했었는데.
상념의 꼬리를 자르지 못하고 일행을 따라 연경당에 들어선다.
시원한 오미자차와 함께 다식을 맛보고 우리 음악과 춤의 매력에 빠져든다.
아이와 함께 청사초롱을 들고 100여분 동안 궁궐을 거닐었던 이 시간들 '행복'이라는 기억의 갈피에 넣어두어야지.
입어보고 싶었던 한복을 다림질하며 설레었는데 궁궐 담장 위로 뜬 달, 부용지에 머물던 그 달을 바라보며 돌아오는 길에
슬쩍 다가와 치맛자락을 건드리고 지나는 바람에게서 가을 냄새가 설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