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이 계속되고 있다. 구월이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건만 여름의 뜨거움은 식을 줄 모른다.
이제부터는 가을인데, 새벽녘 창을 통해 들어오는 시원한 공기가 슬며시 전해주는 가을 소식이다.
곧 오리니 기다리라고. 어디서 만나는 게 좋을까? 우리는 전화기를 귀에 가까이 대고 궁리를 했다. 이 더운 날 종일 몸이 편안하게 지낼만한 공간이 어딜까. 언제부턴가 한가롭게 가보고 싶었던 공항을 떠올렸다.
'우리 공항에서 하루 놀아보자, 그럴까.'로 시작된 여정이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갔었던 곳, 시간에 맞춰 도착과 동시에 출국수속을 하며 정신없이 휙 지나쳤던 공간을 천천히 탐험해 보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공항철도를 타고 도착한 곳, 둥근 천장에서 자연광이 들어오고 자기 부상 열차가 공항 안으로 쑥 들어올 수 있게 설계된 인천국제공항이다. 오래전 자기 부상열차를 타고 공항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시범으로 운행했을 때였나, 무료탑승이었다. 열차 앞부분에서 공항의 터널 안으로 들어가는 열차가 얼마나 신기하고 재밌었던지, 아이처럼 좋아라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친구를 만났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여름휴가철이 지난 때문일까. 공항은 이외로 한가했다.
그리고 시원했다. 우선 성공한 장소 선택이다. 서둘러 나오느라 밥을 거른 친구와 함께 식당을 찾았다.
4층에 가면 한국식 대문으로 통과해서 식당거리를 만날 수 있다.
공항을 여러 번 드나들었지만 처음 가보는 4층이다. 카페 앞에는 한옥으로 지어진 작은 정자도 있다니.
이른 점심을 먹고 정자에 앉아 아래층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바쁜 사람들의 동선이 재밌다.
청소를 하시는 분, 여행가방을 들고 후다닥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일정보다 일찍 도착했을까 의자에 앉아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약국에서 약을 구입하는, 환전을 하기도 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저만치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예전에는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제야 보게 되는 공항의 다양한 모습이다.
위층에서 아래층을 바라보며 이런 여유를 누릴 줄이야.
여기 잘 왔다.
공항 중앙에는 커다란 미디어아트 월이 설치되어 있다. 세로로 길게 마련된 화면에는 수시로 새로운 장면이 연출된다. 이 대형 화면만 바라보고 있어도 즐거운, 어제 DDP 포럼에서 들었던 정보들을 되새기며 미디어아트의 장면들에 감탄한다. 장미의 계절을 지나 단풍 든 숲을 보면서 옆의 벗은 마음이 힐링되는 것 같다고. 나 또한 서늘한 숲에 들어서는 느낌이어서 서울생활의 답답함을 조금은 덜어낸 기분이다.
내가 지리산을 이렇게 좋아했었나 싶을 만큼 요즘 숲, 파란 하늘, 맑은 공기, 푸른 들판을 그리워하고 있다. 와락 한달음에 달려가 폭 안기고 싶은.
행운이었다. 공항에서 KIAF 전시를 만나다니, 생각도 못했는데. 더구나 좋아하는 유영국 작가의 산을 볼 수 있어서. 우선 색이 너무 좋다. 여느 갤러리 못지않은 전시였다. 작가는 산속에 여러 모양의 인생이 숨어 있다고 했는데, 저 산을 보며 그림 속에서 나는 다양한 지리산의 추억을, 결국 그것조차 내 인생의 조각들이겠지만 발견하고 회상한다.
어미젖을 찾아 가슴을 헤집는 아이처럼 산길로 들어가며 안아달라고 투정을 부렸던 시간들,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숲에게만 하소연하던 이야기들,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무작정 떼를 쓰듯 산으로 향했던 그때가 있었다. 그 시간들을 지나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
산에 가시 굵은 나무들이 더러 있다. 부드럽고 살랑거리는 바람만 있지는 않았다.
거친 바람과 따가운 가시가 나를 부축한 선생이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