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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차원 그녀 Sep 24. 2023

15. 나의 쓰레기 아저씨

집에는 언제 오는 겁니까?

아침이다. 아 오늘은 출근 안 하네. 거실에서 아들 녀석은 또 티브이로 유튜브 연결해서 보고 있네요. 아침부터 격하게 빡침을 느낍니다. “또 안경 안 쓰고 누워서 티비 보고 있지?” 잔소리에 내성이 생긴 아들은 꼼짝도 안 합니다. 금요일 저녁에 먹고 남은 볶음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간단히 아침으로 때웁니다. 딸에겐 빵에 잼 발라 대령했습니다.     


남편은 없습니다. 새벽같이 등산 간다고 출발해서 모릅니다. 어제 아들 방에서 잤기 때문에 그가 나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한 달 전부터 아는 동생들하고 지리산 등반인지 뭔지 가겠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해서 가든지 말든지 했습니다. 애들 어릴 때는 단독 외출 문제로 많이 싸운 것 같은데 이제는 싸울 힘도 없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산 가면서 인터넷으로 가방을 지른 건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생각난 김에 고발합니다. 이러면서 나보고는 만날 돈이 없다고 우깁니다. 다시 캐럿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할까요?     


오늘은 집을 치워야 합니다. 추석맞이 대청소쯤으로 해요. 추석에 집에 손님 오시냐고요? 아닙니다. 그냥 9월 개학하고 집이 엉망진창이라 청소 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제 글을 처음부터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엄마께 요리를 못 배웠습니다. 근데 또 하나 못 배운 게 있습니다. 집안일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대로 집안일 하는 법을 못 배웠습니다. 영상으로 검색하니 살림의 고수들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집이 유난히 넓어서도 아니고 특별한 청소 도구가 있는 게 아닌데 그냥 그분들의 손만 닿으니 모델하우스 급으로 깨끗해져서 감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도 깨끗이 살고 싶습니다. 근데 그게 쉽지 않네요. 집안일에서 저의 문제점을 몇 가지 적어볼게요. 저는 상당히 자기객관화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첫째 빨래는 잘 개나 서랍장 정리를 못 한다. 둘째, 설거지는 꼭 쌓아서 해야 한다. 설거지 전 핑곗거리를 꼭 만들지요. 이 정도로 설거지하면 물이 아까워! 셋째, 보이는 곳만 일단 깨끗이 치우자. 저 거실 서랍장에 10년도 넘은 수첩이랑 코로나 때 쓰던 손 세정제 아직 넣어두고 있습니다. 넷째, 여기저기 방을 돌아다니며 청소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어느 방도 완벽하게 마무리를 못 해요. 쉽게 설명해서 거실 청소하다 화장실 서랍장의 수건 채우고, 그리고 아들 방 책상 치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새 물건을 자주 사지 않지만 가지고 있는 물건도 못 버리는 사람입니다. 미니멀 라이프는 항상 동경하지만 이번 생에는 글렀네요.     


아무튼 오전에 열심히 집안일을 했습니다. 빨래도 돌리고, 주방에 쌓인 설거지며, 거실 바닥에 나뒹구는 과일상자도 분리수거장으로 들고 내려가서 정리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얼마 안 있어서 또 점심입니다. 냉동실을 열어보니 며칠 전 남편이 사놓은 LA 양념 갈비가 보이네요. 앗싸 잘됐다! 오늘 점심 메뉴로 당첨입니다. 절대 남편이 미워서 몰래 우리끼리 먹는 거 아닙니다. 남편은 산에서 좋은 피톤치드를 배부르게 먹고 있을 테니 이런 건 눈에도 안 들어올 겁니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좀 잡니다. 왜냐면 그냥 잠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자면 저녁에 잠을 못 자서 내일 컨디션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1~1시간 30분 정도만 자야 합니다. 양치하고 1시쯤 누웠는데 자고 일어나니 3시 30분이 넘었습니다. 망했습니다. 너무 많이 잤네요. 아들 녀석은 또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다가  얼굴을 보고는 놀래서 옷을 갈아입고 놀이터로 도망을 갑니다. 방에서 뒹굴뒹굴하는 딸과 함께 마스크를 사기 위해 다이소로 갑니다. 딸아이는 마스크를 고르고 저는 식탁 의자에 끼울 체어 슈즈와 나무접시스텐드를 삽니다. 나름 오전에 청소하며 집에 필요한 물건을 스캔해 놓았습니다. 남편과 친한 다이소 여 사장님은 남편의 근황을 알고 계시네요. 그리고 저보고 산에 왜 같이 안 갔냐고 물으시네요. 저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산은 오르는 게 아니에요. 올려다 보는 것이지.      


5시가 넘었는데 아직도 남편은 집에 올 생각을 안 합니다. 그가 오면 양손에 지워줄 일반 쓰레기 2봉지와 음식물 쓰레기 한 통, 그리고 분리배출을 기다리는 플라스틱, 스티로폼, 비닐 쓰레기가 2봉지 있습니다. 나의 쓰레기 아저씨 얼른 오세요!     


8시 유튜브 알림이 뜹니다. 김00 TV 볼 시간입니다. 84년생 결혼 안 한 아저씨 둘이 운영하는 채널인데 글쎄, 이 중 한 아저씨가 장가를 갑니다. 당분간 결혼 못 할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를 일입니다. 오늘은 둘이 광장시장 먹투어를 하네요. 저는 왜 집에서 혼자 쓸쓸히 기다리고 있을 그녀가 떠오르는지. 유튜브 촬영도 일이니 그 여자분은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밖에서 저녁까지 배부르게 먹은 남편은 다급하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척하며 뛰어 들어옵니다. 아 남편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를 반겨주는 쓰레기 더미를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그래도 눈치는 살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아들을 불러서 같이 쓰레기 버리러 가네요.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트에 사 온 단감과 샤인머스캣을 준비해 줍니다. 곧 추석입니다. 마누라한테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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