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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차원 그녀 Mar 02. 2024

토끼눈을 사랑한 그녀

이 정도면 나는 내조의 여왕

남편의 눈은 매번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으로부터 오해를 사기에 딱 좋았으니. 피곤하세요? 어젯밤에 늦게까지 술 드셨습니까? 개업식 날 가게를 찾은 큰어머니께서도 걱정하셨다.

 “이 서방 눈이 저래 빨개갛고 피곤하 거 아니가? 보약을 한 지 먹든지 아니면 병원을 한 번 가봐라.”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상의도 없이 안과에 갔고, 당일 수술까지 하고 돌아왔다. 이런 미친 실행력. 나는 기대했다. 이제 토끼 눈과 영영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런데 수술하고부터 자고 일어나면 눈곱이 끼고, 10일도 못 가 다시 새살이 차올라 눈동자가 끝까지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재수술에 재수술.... 간단하게 생각했던 남편의 눈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남편을 괴롭혔다. 계속 차오른 새살을 깎아내는 수술로 인해 한쪽 눈의 시력은 1.2에서 0.9까지 떨어졌고, 병원 좀 가보라고 부추겼던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의사는 수술과 시력 저하는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 그때 병원 상담을 같이 갈걸 그랬어. 왜 의사는 재발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설명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수술을 해 준 거지. 작년부터 이어진 재수술은 손꼽아 세어보지 않았지만 10번도 넘은 것 같다. 수술은 간단했고, 돈도 얼마 들지 않았다. 병원에서 처방해 준 것은 안약과 3일 치 약이 다였다. 퇴근 후 남편이 ‘오늘도 안과 다녀왔어’라고 말하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운이 쏙 빠졌다. 제발 의사가 시키는 대로 병원도 꼬박꼬박 가고 약도 빼먹지 말고 다 먹고, 안약도 정해진 시간에 잘 넣으라고 닦달했다. 그리고 남편의 불 끄고 유튜브 보는 습관 때문에 여러 번 말싸움하기도 했다.      


남편이 당근을 한 봉지 사서 퇴근한 날, 어쩌면 나보다 더 애를 태우고 있었을 남편 생각에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 번거롭지만 며칠간 당근 스틱 도시락을 준비해 주었다. 토끼 같은 남편이 토끼눈으로 토끼밥을 먹네. 며칠 후 감기로 병원에 갔던 나는 약국에서 눈에 좋은 고급 영양제를 사 와서 남편에게 안겼다. 

“여보 할 수 있는 건 다해보자. 병원 가는 것도 지겹잖아. 약사님이 가장 좋다고 추천해 주신 영양제야. 꼭 식사 후에 먹으래. 2달 치니까 다 먹으면 또 사줄게.”

우리의 노력 덕분인지 1월 말 수술 이후에는 눈곱도 끼지 않고 눈알도 잘 돌아가고 있다. 매일 아침 남편의 컨디션을 살피는 나는 아직도 불안하지만, 최대로 오래 버티고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3월 개학을 앞둔 마지막 토요일 아침, 필이 꽂힌 나는 냉장고에 있는 당근을 꺼내 당근 김밥을 싸보기로 한다. 레시피는 어제저녁에 대충 봐두었다. 그리고 내 기준에 번거롭거나 불필요한 과정은 과감히 생략한다. 당근은 채칼로 썰어서 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는다. 달걀지단도 1장 부쳐서 길게 썰어준다. 단무지는 없는데, 아참 저번 주 아이들 자장면 시켜주고 함께 받은 단무지 통을 찾아 그것마저 채 썰어 준비한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밥솥의 밥은 떡밥이다. 햇반도 없던지라 그냥 소금, 참기름, 통깨를 넣어 뒤적뒤적한다. 김을 깔고 밥 한 주걱 올리고 당근은 왕창, 달걀은 2줄, 단무지 조금 넣어서 돌돌 말아준다. 예쁘게 썰어서 접시에 담은 뒤, 씻고 나온 남편에게 대령한다. 

“여보 맛있다.”

“당신 눈만 괜찮아진다면 뭘 못하겠어?”

“아직까진 눈 괜찮은 거 같아.”

“그럼 다행이다. 그리고 오해하지 말고 들어. 생일 주간 이벤트는 오늘까지 끝이다. 내가 다음 주 개학하면 우리 집 식탁도, 우리의 대화도 상당히 빈약해질 테지만 서로 긁지 말고 조심하자.”       


*남편 눈의 정확한 병명은 익상편입니다. 기능상 문제가 없고 외관상 문제로 수술을 고민하시는 분은 신중하게 생각하시라 강력하게 말씀드립니다. 안타깝게도 젊을수록 재발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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