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물질화시키는 고차원적인 작업의 전문가들
한때 '문학소년' 따위의 말들이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에 비해서는 다른 오락 거리가 부족한 때이기도 했거니와, 문학이 사람의 마음에 양분이 된다는 사회적인 믿음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만으로 어느 가을날이 조금 더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책을 읽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과 별개로 우리가 글을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너무 다양해졌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 중에서 넘쳐나는 영상 매체를 통해 글을 배운다. 맞춤법이나 기본적인 문법도 지켜지지 않은 문장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짧은 영상들, 그리고 짧은 댓글들. 모든 것이 짧아지고, 그에 비례해서 거기 담겨 있는 사유의 폭도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뿐인가. 사고의 깊이도 얕아졌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현상들이 종종 눈에 띈다. 짧아지고, 줄어들고, 얕아진다. 이렇게 얕고 엷은 말과 글, 그리고 거기에 담긴 생각을 가리켜 우리는 예로부터 '천박하다'라고 불러 왔다.
물질 문명과 과학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 준 편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그 편리함이 도리어 우리 사유의 깊이를 싹둑 잘라내어 버린 듯한 느낌이다.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기능은 예전으로 치면 초능력인 텔레파시나, 무협지에나 등장할 법한 천리전음에 해당하는 엄청난 능력이다. 이런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도 우리가 하는 일이란 건 때때로 한숨이 나올 정도로 한심한 일들 뿐이다.
조선 선비들은 학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편지글을 주고 받으며 생각을, 그리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갈고 닦았다. 선비들이 자신의 의견을 쓰거나 혹은 상대의 의견을 반박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편지글들을 몇 편만 모아서 잘 엮으면 한 권의 책 정도는 뚝딱 하고 나올 정도다. 이런 선비들에게 지금의 스마트폰과 실시간 메시지 전송 기능이 주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쉽고 편하게 장문의 메시지를 전송하며 학문적 수양을 더욱 갈고 닦아 원래보다 더 찬란한 성취를 이뤄 냈을까? 아니면 디지털이 주는 편리함에 정신을 잃어 우리 평범한 후손들처럼 물질 문명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을까.
인간이 자기 정신에 있는 것을 물질화할 때 가장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도구는 바로 말과 글이다.
한 민족의 말과 글이 어그러지면 그 민족은 자기 정신 안에 있는 숭고한 가치들을 물질화시키지 못 하게 된다. 정신이 물질을 통제하지 못 하면, 남은 것은 물질에 빠져 허우적대며 정신을 잃어 가는 일 뿐이다.
그래서 말과 글을 바로 세우는 일은 중요하다. 한 민족을 망하게 하려는 음모가 있다면, 그 음모를 가장 손쉽게 이루는 방법 중에 하나는 그 민족의 말과 글을 어지럽히는 일이다. 특정 이익집단이 전체 사회를 어지럽히려 할 때도 반드시 그 말과 글을 독점하거나 혼동시켜서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 할 것이다.
'오글거린다'라는 말이 유행한 이후로 감성적인 글을 쓰는 사람들이 확 줄어든 것 같다는 어떤 사람의 고백처럼, 어떤 사회의 구성원들을 천박하게 만들고 싶으면 그 사람들이 쓰는 말과 글을 아주 단순화시키고, 바르지 못한 관념 혹은 균형을 잃은 관념이 스며들어 있는 단어들을 유행시켜서 쓰게 만들면 일은 거의 다 이루어진 셈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유롭게 말과 글을 쓰지 못하고, 누구나 쓰는 관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면서 앵무새와 거기에 반박하는 앵무새만이 남아서 꼭두각시 놀음이나 벌이는 분위기를 만들면, 사람들의 정신은 천박해지고 깊이라는 것을 더 이상 논할 수가 없게 된다. '응 아니야~' 따위의 말만 넘쳐나는 세상이 오면, 사람들은 더 이상 깊이 있게 생각하려 하지도, 그 생각으로 타인을 설득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말과 글로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사람들은 지금 같은 시대에는 더더욱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는 셈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조차도 예전에 알던, 너무나 익숙하게 향유하던 많은 표현들을, 그 정서들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다. 그래서 가끔이라도 그 옛날의 책장들을 다시 넘겨가며 기억을 더듬지 않으면, 자꾸 천박해지려는 정신을 온전히 붙들고 있기가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과거의 유산을 계승하여, 현재와 미래에도 통할 새로운 유산을 만들어내는 일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으면 하는 마음은, 이래서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