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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찻잔

평론가 청람 김왕식






노인의 찻잔



청람 김왕식




5월의 끝자락,

여름이 성큼 다가온 순간,

축령산의 편백 숲은 새롭게 녹음을 펼쳐내며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숲의 향기가 가볍게 공중을 떠돌고,

햇살이 산책로를 환히 밝힌다.

이 숲은 특별히 두 사람,

오랜 시간 이곳을 찾아온 노인과

암 치유를 위해 처음 발을 들인 젊은이에게

평화의 피난처가 된다.

노인은 평상에 앉아,

오랜 세월을 지켜온 부채를 들고

고요히 바람을 만든다.

그의 옆으로 접근하는 젊은이의 발걸음은 무겁지만,

눈빛은 숲의 푸르름에 점점 맑아진다.

노인이 천천히 차를 건네며 말한다.


"앉으시오."


차 향은 안개를 헤치며

마음을 달래준다.

젊은이는 찻잔을 들며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이 찻잔이 너무 무겁네요."


그의 고백은

찻잔의 무게가 아니라

마음의 무게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그 찻잔을 오래 들고 있으면 그 무게가 어떻게 느껴지는지 보려 한 것이오."

젊은이의 팔이 점점 지치자,

노인은 조용히 말한다.


"찻잔을 내려놓으시오."


찻잔이 탁자 위에 내려앉자,

젊은이의 팔에는 시원함이 퍼진다.
노인의 목소리는 다시금 울린다.


"봤소? 우리의 고민도 그렇소.
잠시 내려놓으면,

그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산을 내려오는 길에 노인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며 말한다.


"인생도 마찬가지오.

어떤 것들은 잠시 내려놓아야,

다시 힘을 얻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소."

젊은이는 숲길을 걸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이 편백 숲길을 걸으며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노인은 주위의

오색 딱따구리 소리를 가리키며

대답한다.


"여기 오색 딱따구리 소리 들어보소.

이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지 않소."

젊은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네,

정말 신기하게도 자연의 소리가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은 몰랐어요."


그의 말은 피톤치드와

음이온이 체내로 흘러들어

모든 악을 씻어내는 것 같다고

덧붙인다.

노인은

느릿한 발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이곳 축령산 피톤치드는

병원 약보다 나은 것 같소."


그의 말에는

숲이 주는 선물이 때로는

현대 의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채워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젊은이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대답한다.


"저도 그렇게 느껴요.

공기 중에 섞인 피톤치드가 체내로 들어와

모든 악을 씻어내는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에는

숲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감사가 묻어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의 힘을 인간 삶에 접목시키는 방법을 보여주며,

편백 숲의 향기가

단순한 자연의 한 부분이 아니라,

강력한 치유와

회복의 도구로 작용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연이 인간의 삶에

근본적인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시사한다.

노인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며 말한다.


"매번 여기 오면 느끼는 거지만,

자연은 정말 우리에게 가장 좋은 치유자요.

편백 숲의 향기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소."

젊은이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정말이에요.

병마와 싸우는 저에게

이곳은 마치 안식처 같아요.

여기서 받은 에너지로

다시 일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곳을 찾는 이들은 자연의 속삭임을 통해

인생의 깊은 의미를 찾고,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노인과 젊은이는

이 숲에서 시간을 보내며

서로 다른 삶의 단계에서 얻은 깨달음을

공유한다.

이것은 단순한 대화가 아닌,

생명의 근원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나누는 순간이다.

숲의 고요함 속에서,

노인과 젊은이는

그들보다 훨씬 큰 그림자를 밟으며

숲 속 깊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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