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청람 평하다
곽재구 시인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ul 1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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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시인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섦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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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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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는 겨울밤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내면적 고독과 그리움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시는 대합실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내면세계를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시는 전반적으로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띠며,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첫 행은 독자에게 긴장감과 기다림의 분위기를 즉각적으로 전달해 준다. 막차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단순한 상황 설명을 넘어, 기다림의 불확실성과 지루함을 암시한다. 이 대목은 시의 배경을 설정하고,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경험을 제시한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이 행은 외부 환경의 묘사를 통해 고요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송이눈"이라는 표현은 부드럽고 평화로운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기다림의 시간 동안 천천히 쌓이는 눈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여기서 "흰 보라 수수꽃"은 눈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유리창에 맺힌 서리의 아름다움을 그린다. "톱밥 난로"는 따뜻함과 대비되는 차가움을 상징하며, 대합실 내부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믐처럼"이라는 표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사라져 가는 모습을 나타내며, 대합실에서의 기다림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졸고, 감기에 쿨럭이는)은 그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여기서 "그리웠던 순간들"은 화자의 내면적 회상을 나타낸다.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지는 행위는 그리움과 회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불빛 속에서 사라지는 톱밥은 사라져 가는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면에 할 말이 가득하다는 것은 억눌린 감정과 표현되지 않은 생각들을 의미한다. "청색의 손바닥"은 차가운 겨울의 색감과 감정의 냉기를 나타낸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침묵의 순간은 기다림의 무거움을 극적으로 강조한다.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여기서 "만지작거리며"는 조용한 행동과 불안한 마음을 동시에 나타낸다.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기다림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 과정에서의 인내를 보여준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오래 앓은 기침 소리는 지속적인 고통과 불편함을 나타내며, 쓴 약 같은 입술은 고통의 상징이다. 담배 연기와 눈꽃의 대조적인 이미지는 인간의 고통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는 것은 자연의 소리를 통해 평온함을 찾는 순간을 표현한다. 이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위안을 찾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자정 넘으면 낯섦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자정을 넘으면 모든 것이 설원이 된다는 표현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모든 것이 하얗게 덮여가는 모습을 그린다. 단풍잎 같은 차창은 지나가는 계절의 흔적을 상징하며, 밤 열차의 목적지 불확실성은 삶의 여정을 암시한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마지막 행에서 화자는 그리웠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지는 행위는 감정의 정화를 나타내며, 시의 끝에서 감정의 절정을 이룬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는 섬세한 묘사와 상징적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인은 차가운 겨울밤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그려내면서도, 그 속에서 느껴지는 인간의 고독과 그리움을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독자가 시 속의 장면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시의 구조는 반복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며, 각 행마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점진적인 전개는 독자로 시의 흐름을 따라가며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 매우 완성도 높은 작품이지만, 일부 표현이 다소 모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청색의 손바닥"이라는 표현은 독자에게 명확히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는 겨울밤의 고독과 그리움을 섬세하게 그려낸 뛰어난 시다. 시인은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와 상징적 표현을 통해 독자에게 깊은 감정적 울림을 전달한다.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느껴지는 인간의 내면적 고독과 그리움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독자로 시의 분위기에 몰입하게 한다. 이 작품은 표현의 섬세함과 감정의 깊이로 인해 독자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