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Aug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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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미쳤고, 펄벅은 울었다
철학자 니체는 미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말년은 철학적 사색과 탐구로 가득 찼던 인생이 갑작스레 무너지는 충격적인 모습으로 기록되었다. 1889년 겨울, 이탈리아 토리노의 추운 거리를 걷던 니체는 한 장면을 목격한다. 평범한 날이었고, 그는 우체국에 편지를 부치러 가던 중이었다.
광장 한복판에서 그는 늙은 말이 매질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무거운 짐마차를 끌고 가던 그 말은 빙판길에서 발이 얼어붙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말은 마부의 채찍질에도 꼼짝하지 못했고, 마부는 더욱 화가 나서 잔인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짐마차의 무게와 말의 고통이 한데 얽혀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
이 장면을 본 니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마차로 뛰어들어가 늙은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말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그는, 세상의 무게를 짊어지고 고통받는 존재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드러냈다. 이웃들이 그를 집으로 데려갔고,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이틀을 꼬박 보냈다. 그 후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이후 니체는 11년 동안 정신이 나간 상태로 누워 지냈고, 마침내 그 고통스러운 생을 마감했다. 그의 그리도 뜨거운 눈물은, 단순한 동물에 대한 연민을 넘어, 자기 자신의 처지와 인류 전체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짐을 지고 끝없이 채찍에 맞으며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그리고 그 자신에게 깊은 감정이입을 했던 것이다. 인생이란 종종 무겁고, 벗어나기 힘든 짐을 지고 가는 여정임을 그는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채찍은 가죽 채찍일 수도 있고, 세상의 냉혹한 시련일 수도 있다. 니체는 그 아픔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1960년, 미국의 저명한 소설가 펄 벅은 한국에서 하게 된다. 늦가을의 경주로 향하는 길에, 그녀는 군용 지프를 타고 한적한 시골 풍경을 지나고 있었다.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농부들은 수확의 계절을 맞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차는 경주 안강 부근을 지나던 중, 뜻밖의 장면을 목격한다.
한 농부가 소달구지 옆에서 지게에 볏단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 달구지에는 이미 볏가리가 가득 실려 있었지만, 농부는 여전히 자신의 몸으로 짐을 나누어지고 있었다. 펄 벅은 차를 세우고 이 장면을 사진에 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 통역에게 물었다.
"왜 저 농부는 힘들게 볏단을 짊어지고 갑니까? 소달구지에 전부 싣고 가지 않나요?"
통역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소가 너무 힘들까 봐 농부가 짐을 나누어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 말에 펄 벅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이제 한국의 다른 모습은 더 보지 않아도 알겠다. 저 농부의 마음이야말로 한국인의 마음이고, 오늘날 인류가 되찾아야 할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이다.”
펄 벅은 자신의 조국인 미국을 떠올렸다. 만약 미국의 농부였다면, 짐을 나누어 지기보다는 온 가족이 달구지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며 갔을 것이다. 소가 고통 받든 말든 그들의 목적은 자신의 편리함과 즐거움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의 농부는 소와 함께 짐을 나누며 살아가는 가족 같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인간과 짐승이 함께 짐을 나누고,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는 그 모습은 그녀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메시지를 얻는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삶의 무게를 지고 나아간다. 그 무게는 각자 다르지만, 그 무게를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위로와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다. 같은 종끼리, 인간들끼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그 기본적인 존중과 연민을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에게 채찍질하는 마부처럼 행동하며, 자신이 겪는 고통을 남에게도 강요하기도 한다.
소셜 미디어와 같은 공간에서는 이기적인 말들이 비수처럼 날아다니며, 상대방의 아픔을 고려하지 않고 무자비한 상처를 준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 멈추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농부가 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아픔을 함께 지고 가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 그 짐이 때로는 너무 무거워 어깨를 짓누를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연민을 가지고 그 짐을 함께 나누어져야 한다. 그 작은 행동이 모여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들고, 우리 모두가 조금 더 견디기 쉬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늙은 말에게 채찍질하는 마부가 아니라, 소와 함께 짐을 나누어지는 농부가 되기를 바란다.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 따뜻한 인정의 샘물이 넘쳐나는 세상은 바로 그런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