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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서서

청람 김왕식










가을에 서서





사람은 누구나 젊을 때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믿기 마련이다. 젊음은 푸르고 열정은 넘쳐난다. 손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가득하고, 마음은 자신만의 꿈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이 너무 꽉 차 있는 동안, 주위의 빈 공간들을 쉽게 보지 못한다. 자신의 향기가 너무 짙어서 다른 사람들의 향기를 맡을 줄도 모른다.

젊은 시절에는 앞길만을 바라보며 달려온다. 밥그릇은 언제나 가득 차 있다. 배부르게 먹고 있는 동안, 누군가의 밥그릇이 비어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알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손에는 언제나 원하는 것이 쥐어져 있고, 눈은 바라던 목표만을 향해 있다. 발걸음은 언제나 빠르고 힘차지만, 다른 이들의 발자국이 얼마나 무겁고 힘겨운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부모의 사랑, 친구의 우정, 연인의 애정, 모든 것이 나를 향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볼 줄 모르고, 그저 받기만 하는 것이 사랑이라 여기게 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을의 문턱에 서게 된다. 찬란했던 시간들은 서서히 바래기 시작하고, 윤기 나던 것들은 퇴색해 간다. 어느 순간, 자신에게서 나던 향기가 옅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주변에 퍼지던 그 강렬한 향기가 아니라, 은은히 풍겨오는 다른 이들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세상에는 나 말고도 수많은 향기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고픈 이들의 빈 소리다.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 조용한 절규,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갈망이 점점 더 또렷이 들려온다. 목마른 이들의 갈라지고 터진 마음도 이제 보인다. 그동안 그 소리들을, 그 아픔들을 외면하고 지나쳤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고통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그들의 존재가 느껴지고, 그들의 소리가 뚜렷이 들린다. 그 울림은 너무나 크고 깊어서 가슴속에 메아리친다. 이것이야말로 늦게 찾아온 삶의 깨달음이다. 잘못된 시선을 돌아보고, 이기적이었던 마음을 반성하게 한다.

국화꽃처럼 은은한 향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너무 짙은 향기로 다른 사람의 향기를 덮어버리지 않도록,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밥그릇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것만이 아니다. 채워야 할 것은 내 밥그릇이 아니라, 고픈 이들의 빈 밥그릇들이다. 그들의 허기진 마음을 달래고 싶다. 주어진 사랑을 이제는 잘 가꾸어 풍성하게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제는 가을의 문턱에 서서 겸손의 언어로 삶을 채워 나가려 한다. 받기만 하는 삶이 아니라, 나누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나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이제 나의 향기는 다른 이들의 향기와 어우러져, 은은한 국화꽃처럼 세상을 따뜻하게 물들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무지와 이기심은 이제 가을바람에 휘날려 사라지고, 남은 것은 새로운 결심과 다짐이다. 그 다짐이 남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의미 있게 만들어줄 것임을 믿으며, 가을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게 된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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