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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화 시인의 '가을이다'를 청람 평하다

청람 김왕식









가을이다




시인 배정화







햇빛에 지쳐가는 사람들
초목이 늘어져 잎이 탄다

너무 덥다고 짜증 내며
더위를 이기지 못하는
생명의 고난

가마솥 더위에도
모든 작물에 정성을 다하는 농부들은
땀방울로 밭을 가꾼다

장마와 태풍에 쓰러질까 노심초사
풍성하게 자란 것을 보며
까맣게 탄 얼굴에 하얀 이가 귀에 걸린다

이제 가을이다
포도넝쿨 하나에 쓰러지게 달린 열매
깊은 맛을 주는 가을을 밝힌다

산 넘어간 매미 노래 강물에 잦아들고
풀벌레 노래 뜰에 가득
여름의 어지러움을 지운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배정화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과 자연, 그리고 그 속에서의 삶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시인이다. 그는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 깊은 철학적 의미를 발견하고, 그 순간들을 시로 승화시켜 독자들에게 감동을 전달한다. 배정화 시인의 삶과 시는 단순히 자연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내면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탐구하며,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생명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의 작품에는 시인이 경험하고 느낀 모든 순간이 농축되어 있으며, 그 순간들은 독자들에게 공감과 깨달음을 준다.

이제 각 행을 분석하며 시의 다층적인 의미와 감성적 측면을 살펴보겠다.

"햇빛에 지쳐가는 사람들 / 초목이 늘어져 잎이 탄다"는
여름의 끝자락을 표현한다. 사람들은 뜨거운 햇볕에 지쳐가고, 초목도 마찬가지로 시들어간다. 여기서 시인은 사람과 자연을 동일시하며, 뜨거운 여름을 견뎌내는 생명의 고단함을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잎이 탄다는 표현은 단순히 식물의 상태를 넘어선,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어 겪는 고통을 암시한다. 이는 삶의 고난과 인내를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너무 덥다고 짜증 내며 / 더위를 이기지 못하는 / 생명의 고난"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나타낸다. 더위를 이기지 못해 짜증을 내는 모습은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생명이 가진 고난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생명의 고난'이라는 표현은 여름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생명들이 겪는 시련을 함축하며,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모두가 겪는 공통된 고통을 드러낸다.

"가마솥 더위에도 / 모든 작물에 정성을 다하는 농부들은 / 땀방울로 밭을 가꾼다"는 여름의 가혹함 속에서도 농부들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 구절은 노동의 숭고함을 부각한다. 농부들의 땀방울은 단순한 노동의 결과물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헌신을 상징한다. 이는 인간이 자연에 맞서기보다는,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신을 조율해 나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장마와 태풍에 쓰러질까 노심초사 / 풍성하게 자란 것을 보며 / 까맣게 탄 얼굴에 하얀 이가 귀에 걸린다"는 농부들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다. 그들은 자연의 위협 속에서 긴장하지만, 그 결과물이 풍성하게 자랐을 때의 기쁨 또한 크다. '까맣게 탄 얼굴에 하얀 이'라는 대비적인 표현은 고단한 노동과 그로 인한 성취감이 엇갈리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 순간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느끼는 희열과 연결되며, 고난을 견뎌낸 자만이 맛볼 수 있는 기쁨을 상징한다.

"이제 가을이다 / 포도넝쿨 하나에 쓰러지게 달린 열매 / 깊은 맛을 주는 가을을 밝힌다"는
가을의 도래와 함께 찾아온 풍요로움을 노래한다. 여름의 고난과 수고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포도넝쿨에 달린 열매는 단순한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땀과 노력이 결합된 결과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노력이 합쳐져 이루어지는 결과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깊은 맛을 주는 가을'이라는 표현은 가을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생각하게 한다.

"산 넘어간 매미 노래 강물에 잦아들고 / 풀벌레 노래 뜰에 가득 / 여름의 어지러움을 지운다"는
여름의 소란스러움이 사라지고, 가을의 고요함이 찾아오는 장면을 그린다. 매미의 노래가 잦아들고 풀벌레의 노래가 들려오는 장면은 계절의 변화를 극적으로 표현하며, 시적 공간에 평온함을 부여한다. 이는 자연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인간의 감정과도 연결되며,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시는 여름의 고난과 가을의 풍요로움을 대비시키며,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어떻게 삶을 견뎌내고, 또 그 안에서 어떻게 희망을 발견하는지를 보여준다. 배정화 시인은 자연을 통해 삶의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그의 시에는 깊은 성찰과 함께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신념이 담겨 있다.
표현상의 특징으로는 대조적 이미지 사용과 함축적인 언어가 돋보이며, 이를 통해 시의 감동을 극대화하고 있다. 주제의식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이다.
배정화 시인의 시는 그 자체로 자연에 대한 경외와 인간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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