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Sep 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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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학
청람
세상을 살다 보면 꽃나무를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때, 혹은 장미의 진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할 때, 사람들은 그 찰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꽃의 짧은 생명에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정작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꽃나무가 꽃을 피우기 위해 준비하는 긴 시간이다. 꽃나무는 일 년 내내 꽃을 피우지 않는다.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꽃 없이 보내며, 나무는 꽃을 피우기 위한 내밀한 준비를 지속한다.
고은 시인의 시 ‘꽃’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무심한 듯 피어나도
한 철의 무거움이 꽃에 맺히니
그 무게를 견디는 뿌리의 깊음이여."
이 시구처럼 꽃이 피는 순간은 그저 한철일 뿐이다. 그 한철을 위해 나무는 모든 계절을 견디고 살아낸다. 눈부신 꽃의 이면에는 꽃이 피지 않는 오랜 시간이 있다. 그 시간 동안 꽃나무는 잎을 무성하게 키우고 뿌리를 단단하게 번성시킨다. 꽃잎이 떨어지고 나면, 다시 꽃이 필 때까지 나무는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한 번 자양분을 끌어올리고, 가지와 잎은 더욱 굳세게 자란다. 이 모든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나무의 끊임없는 노력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나무는 그 자리를 지킨다. 나뭇잎은 비바람에 이리저리 휘어지지만, 끝내 떨어지지 않으려 애쓴다. 나뭇가지들은 마치 손을 맞잡고 있는 듯 서로를 지탱하며, 흔들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또한 가뭄이 들 때면, 뿌리는 더욱 깊숙이 물을 찾아 내려간다. 그 뿌리의 인내는 나무 전체의 생명을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이렇게 사철 동안 나무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보며, 한철의 꽃을 위해 오랜 시간 견디고 준비한다.
유자경의 '유자소전'의 한 구절인
"자연은 말이 없고 나무는 사철 서 있으니
만물이 다 때가 있음을 어찌 모르랴."에서처럼
꽃나무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 속에는 삶의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 가르침은 바로 인내와 기다림의 미학이다. 사람들은 종종 삶에서 즉각적인 결과를 원하고, 손을 뻗으면 바로 닿기를, 손을 내밀면 바로 잡히기를 바란다. 꽃나무의 교훈은 성급한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그저 한 번 꽃을 피우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준비하고 기다리는지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삶에서 성공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그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낙담하기 쉽다. 꽃나무처럼 한 철의 성과를 위해 긴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꽃이 피지 않는 시간에도 나무는 끊임없이 자라며, 자기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간다. 그 과정을 통해 나무는 더욱 강해지고, 다음 꽃 피울 때를 위한 에너지를 비축한다.
이정록 시인의 시
"매화는 찬 바람을 겪어야 향이 짙어지고
인생도 마찬가지로 고비를 넘어서야 빛난다."의 한 구절이 그러하듯,
우리 역시 때로는 성급함을 자책하게 된다. 일에서든 관계에서든, 빨리 결과를 보고 싶은 마음에 무언가를 서두르게 된다.
꽃나무를 바라보며, 우리는 그 속에서 겸손과 기다림의 미덕을 배운다. 나무는 자신의 시간을 존중하며, 아무리 긴 겨울이라도 초조해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는 자연의 이치를, 나무는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정호승 시인은
"봄눈 녹듯 스며드는 지혜/ 바람결에 피어나는 겸손."이라고 말한다.
꽃나무의 말 없는 가르침을 통해, 사람들은 비좁은 가슴을 다독이며 겸손을 배우고자 한다. 세상이 자신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삶의 작은 고비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뿌리를 더 깊고 튼튼하게 내리는 법을 배운다.
그러한 인내의 시간을 통해, 언젠가 사람들도 각자의 인생에서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꽃나무는 그저 가만히 서서 자기만의 길을 간다. 누구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살아낼 뿐이다. 사람들은 꽃나무의 삶에서 더 깊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인내와 기다림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그 힘이야말로 삶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가 아닐까.
결국, 꽃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비유이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안내자이다.
법정 스님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떠올려본다. 사람들은 꽃나무처럼 스스로의 시간을 존중하고, 견디고 인내하며, 때가 되면 각자의 꽃을 피워야 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배워야 할 꽃나무의 삶,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진정한 모습이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