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Sep 27. 2024
지하철 풍속도 ㅡ 고개 숙인 사람들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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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인 사람들
청람 김왕식
지하철은 아침과 저녁, 도시를 가로지르며 바쁜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그 안은 인간 군상이 집약된 무대, 하루의 피로와 목적 없는 시간들이 서로의 눈을 피한 채 엉켜 있다. 수많은 표정과 무표정이 뒤섞이고, 각자의 사연과 무관심이 자리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자리싸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의 화면에 고개를 숙이고, 눈동자는 손 안의 디지털 세계에 붙잡혀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진 현실을 애써 무시한다. 현실의 사람보다 가상 세계의 스크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젊은 청년, 그리고 그 옆에서 서성이는 노인. 노인은 힘겹게 지팡이를 짚고, 어깨를 움츠리며 서 있지만 청년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다. 마치 눈앞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손 안의 화면만을 응시한다. 노인의 한숨도, 그가 힘겹게 일어서는 모습도, 그 청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는 건 눈앞의 화면뿐. 사실, 이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무관심일 뿐이다. 배려의 부재는 의식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무관심한 이들은 누구를 배려해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그들의 의식은 모두 손 안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기차 안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 그 속에서 피어나는 웃음과 눈물은 전혀 보지 못한 채 스크롤을 내리기만 한다. 오늘의 뉴스, 오늘의 유행, 오늘의 밈, 오늘의 트렌드. 그것이 현실보다 중요하다. 눈앞에서 넘어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그 모르는 사람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어쩌면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 할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크린 속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현실에서의 배려와 소통을 잊은 지 오래다.
지하철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각양각색의 복장이다. 과거의 복장 규율은 이제 더 이상 없다. 머리를 짧게 깎아 남자처럼 보이는 여성은 바지 위에 치마를 걸쳤다. 그 누구도 그녀의 선택을 묻지 않는다. 마치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시대처럼. 복장의 규범은 이제 의미가 없다. 더 이상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는 없다. 그냥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입고 살아간다. 한편 저만치 서 있는 여성은 속치마로 보이는 레이스를 드러낸 채 서 있다. 실수로 드러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패션을 연출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더불어 온몸에 문신을 두른 한 남자는 치마바지를 입고 앉아 있다. 그의 스타일에 대한 누군가의 시선은 이미 무뎌졌다.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시대. 구분할 필요도 없는 시대. 남성과 여성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동성 간의 사랑과 결혼이 공공연히 인정되는 시대에 성별의 구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구별하지 않는 것이 옳다. 다만 각자의 선택과 자유를 존중할 뿐이다. 사람들은 성별, 나이, 직업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지하철이라는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그러나, 이 시대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일까? 사람들은 자유롭게 옷을 입고,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스스로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가 진정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강요된 유행의 굴레에 빠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자신을 표현한다는 명목 아래 주류에 따르고,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자신을 찾은 것인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개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어쩌면 더 큰 규범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지하철은 현대 사회의 축소판이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는 세상.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외부의 영향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무의미한 구별과 경계의 해체 속에서 오히려 더욱 분명해지는 무관심과 무신경.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가, 아니면 그저 자유로운 척하고 있는가.
지하철은 오늘도 그렇게 달린다.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방향을 찾지 못한 채. 오늘도 사람들은 스크린 속 세계에 갇혀 현실의 소음을 지우고, 자신의 세계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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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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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가님의 글을 읽은 독자입니다. 먼저, 깊이 있는 통찰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하철이라는 일상의 풍경을 그려주신 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글을 읽으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마치 거울처럼 비춰보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안에는 저 자신도, 제 주변 사람들도, 그리고 이 도시를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얼굴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매일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면서 휴대폰에 고개를 숙인 채 하루를 시작합니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보다 화면 속 가상 세계가 더 중요해져 버린 우리의 삶. 이제는 너무나 당연해진 풍경이지만,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것이 사실은 무관심의 한 단면이고, 우리가 잊어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지하철 안에서 저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그저 목적지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옆에 노인이 서 있든, 장애인이 비틀거리고 있든, 저는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죠.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 모습이 얼마나 무관심하고 또 무감각한 행동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저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섬뜩하기도 했습니다.
작가님께서 묘사해주신 ‘고개 숙인 사람들’, ‘무관심한 현실’은 저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너무나 정확하게 그려주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고, 눈앞의 현실을 애써 무시하며 살아가는지를 일깨워주는 강렬한 자극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소통하는 것의 중요성을 잊어버린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별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요즘 시대의 다양한 모습과 경계가 무너진 현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이제는 더 이상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이라는 경계가 무의미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작가님께서 글에서 던진 질문이 저를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말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저를 다시 돌아보게 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유행, 그저 남들이 하니까 따라가는 선택이 아닌 진정으로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글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게까지 무관심한 걸까?”, “모두가 정말로 그렇게 각자의 세계에 갇혀 있는 걸까?”라는 반문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도 어쩌면 작가님이 말씀하신 ‘무관심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두려워졌습니다. 우리 사회가 무관심하고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걱정이야말로 글이 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가 나를 돌아보고,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게 만들었기에 이런 고민도 가능했으니까요.
작가님의 글은 저에게 반성과 성찰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작은 결심을 했습니다. 앞으로 지하철을 타면 저도 잠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볼까 합니다. 휴대폰 화면에 갇혀 있지 않고, 누군가 힘들어하고 있다면 눈을 마주치고 미소라도 지어보려고 합니다. 이 작은 변화가 우리 사회를 바꾸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시작은 저부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모두가 조금씩 무관심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고요. 우리 모두 각자의 삶에 치여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서로를 바라보고자 하는 따뜻함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조금씩 전해져, 언젠가는 지하철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해 봅니다.
작가님의 글은 저를 변화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저와 같은 많은 독자들이 작가님의 글을 읽고 자신을 돌아보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해 주시고, 우리 모두에게 큰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를 향한 작가님의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한 독자가 올림.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