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Sep 28. 2024
■
가을의 문턱에서
청람 김왕식
무더위가 한풀 꺾이니, 어느덧 가을의 기운이 스며든다. 바람은 더 이상 뜨겁지 않고, 살랑살랑 부드럽게 불어와 몸을 감싼다. 파랗던 하늘은 점점 투명하게 물들어 가고, 뜨겁던 태양은 부드러운 빛으로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들녘에는 황금빛이 드리워지고, 고개를 숙인 벼들이 서로 부딪히며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마치 한 해의 노고에 대한 보답처럼 들리고, 수확의 풍요로움이 묻어난다. 그렇게 자연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가을의 옷을 입어 간다.
문득 나의 인생에도 가을이 찾아왔음을 느낀다. 싱그러운 초여름이 어느새 지나가고, 풍요롭고 성숙한 가을로 접어든 나날들. 인생의 봄과 여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의 가을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무르익어 가듯, 나 역시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성숙해진다. 지나온 날들은 바람에 날리며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들은 지금 이 가을에 비로소 나를 이루는 자양분이 된다.
가을의 손님은 언제나 풍성하다. 한밤중에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 어디선가 스며드는 맑은 바람 소리. 이런 소리들이 이 계절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든다. 세월은 항상 우리보다 한 발 빠르게 앞서 나가고, 숨 가쁘게 흐르는 시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순간을 음미하고 느끼는 것뿐이다. 어느덧 가을이 다가오는 소리에 마음속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바쁘게 지내던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가을의 정취에 취해보는 시간. 밖으로 나와 보면 논밭에는 벼가 무르익어가고, 과일나무에는 탐스러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그 열매들은 이제 제때를 기다리고 있고, 가을바람은 그들을 살짝살짝 흔들어 깨운다.
길가에는 이름 모를 가을꽃들이 피어 있다. 봄의 화려함과는 다르지만, 가을의 꽃은 가을만의 차분한 아름다움이 있다.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피어나는 모습은 인생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피어나는 과정이 어렵고도 아름답다는 것을, 그리고 피어난 후에는 그저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우리에게 가을의 깊은 맛을 알려준다.
이렇게 한 계절이 지나간다. 더위로 가득했던 여름도 이제는 추억이 되어 마음 한편에 남게 된다. 그리운 사람들과의 순간,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땀 흘리며 웃던 기억,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식히던 시간들. 모든 것이 한 장 한 장 소중한 추억이 되어 가슴에 새겨진다. 그리고 이렇게 지나가는 시간 뒤에는 다시 겨울이 찾아오겠지. 겨울의 고요함 속에서 또 다른 생각과 추억을 만들어가며 그렇게 인생은 이어질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가을이 오는 길목에 서서 나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든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새파란 하늘, 서서히 익어가는 곡식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소리 없이 다가와 오늘 하루를 풍요롭게 채워준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 간다. 아쉬움이 가득한 오늘을 뒤로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나는 이 순간을 고스란히 마음에 담아둔다.
가을의 문턱에서, 지나가는 시간들을 느끼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간다. 이 아름다운 계절의 끝자락에서, 모든 것이 스쳐가듯 흘러가지만, 그 안에 담긴 순간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