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광일 시인의 '가을에'를 청람 김왕식 평하다
주광일 시인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Oct 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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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시인 주광일
시들어 가는 가을에
벌써 시들어버린
나는 가리
멀리 흙 쌓인 곳으로
혼자 남은 낙엽이
흙을 찾아가듯
나도 흙을
찾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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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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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광일 시인은 깊이 있는 내면과 삶의 유한함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진 원로 작가이다. 그의 시는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삶을 조화롭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자연의 소멸과 재생을 통해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을 지니며, 생의 무상함과 그에 대한 성찰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작가이다. 이러한 삶에 대한 통찰은 이번 작품인 '가을에'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시들어 가는 가을'이라는 계절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사라져가는 존재에 대한 인식을 자연스러운 언어와 심상의 흐름으로 표현하며, 이를 통해 작가의 삶과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시들어 가는 가을에"
첫 행은 가을이라는 계절의 특성을 간결하게 드러낸다. '시들어 가는'이라는 표현은 생명력의 저하와 쇠퇴하는 분위기를 암시하며, 가을의 시들어가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삶 또한 사라지고 소멸해 가는 무상함을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개인의 감정과 삶의 상태에 비유하며 자연과 인간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가을이 가진 색채와 분위기를 간결하게 전달한다.
"벌써 시들어버린"
이 두 번째 행에서 시인은 '벌써'라는 단어로 사라짐에 대한 갑작스러움과 무상함을 표현한다. 가을이 시들어가는 것처럼 '나' 역시 이미 시들어버린 존재임을 자각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나'라는 존재가 가을의 변화를 통해 자신의 삶과 감정을 투영하는데, 이는 자연의 변화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가리 / 멀리 흙 쌓인 곳으로"
세 번째와 네 번째 행에서는 시인의 주체적 결단이 드러난다. '나는 가리'라는 짧은 선언은 자신의 삶과 존재의 종착지를 향해 떠나는 결심을 드러내며, '흙 쌓인 곳'은 죽음과 귀의에 대한 은유로 해석된다. 이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운명과 무상함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보이는데, 인간의 삶 또한 흙으로 돌아가 자연의 순환에 참여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멀리'라는 공간적 표현을 통해, 죽음이 단순히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자 귀의의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다.
"혼자 남은 낙엽이 / 흙을 찾아가듯"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행에서는 '혼자 남은 낙엽'이라는 고독한 존재를 통해 인간의 삶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떨어져 나온 낙엽은 더 이상 나무에 매달려 있지 않은, 홀로 존재하는 삶의 모습을 상징하며, 이러한 낙엽이 흙을 찾아가듯 '나' 역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적인 귀의와 통합을 추구하고 있다. 이때 '혼자'라는 표현은 죽음 앞에서의 인간의 고독과 고립된 심정을 강조하는 동시에, 삶의 끝에서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소망을 내포한다.
"나도 흙을 / 찾아가리"
마지막 두 행에서 시인은 낙엽처럼 자연의 순환에 동참하겠다는 결심을 표현한다. '나도'라는 단어를 통해 낙엽의 움직임에 공감하고 그와 같은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죽음과 사라짐에 대한 긍정적 수용과 자연으로의 귀의는 무상함을 초월한 삶에 대한 관조적 태도로 읽힌다. 이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감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이고, 또 다른 생명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순환적 인식이다.
이 시는 가을이라는 계절의 이미지와 감성을 활용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시인의 언어는 짧고 단순하지만, 그 안에 함축된 의미는 깊다. 가을의 시들어가는 모습, 낙엽의 움직임, 흙으로 돌아가는 여정 등은 모두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삶의 무상함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시들어버린', '흙 쌓인 곳', '혼자 남은 낙엽' 등의 이미지는 독자에게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생명과 소멸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러운 귀의를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생명과 죽음, 소멸과 귀의의 과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가을의 이미지와 낙엽의 움직임을 통해 개인의 삶이 자연의 흐름 속에서 소멸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려내며, 이는 곧 자연의 순환 속에 하나로 귀결되는 존재의 이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철학은 인간의 삶을 보다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로 이어지며, 자연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시인의 가치관을 잘 드러낸다.
'가을에'는 짧지만 깊이 있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이다. 주광일 시인은 가을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을 사색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자연과의 순환 속에서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표현한다. 시는 전체적으로 가을의 분위기와 고독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낙엽과 흙을 통해 삶의 마지막 노정을 암시하고 있다. 표현은 간결하고 절제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의 연결고리를 다층적으로 담고 있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죽음에 대한 긍정적 수용과 자연에 대한 귀의는 시인의 사유를 투명하게 드러내며, 그 흐름은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가을에'는 삶의 소멸과 존재의 귀의를 자연과 조화롭게 묘사한 시로, 독자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