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밤이 떨어졌다 ㅡ 백영호 시인
배영호 시인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Oct 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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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밤이 떨어졌다
시인 백영호
시월 가을 결이 곱다
둘레길 모퉁이 드니
칠순 굴참나무 영감
제 살점 굴밤을 떨궜다
한 되 두되 한말 두말
가마니로 떨구었다
사월에 젖꼭지 열매 달며
하늘 벗님과 약속 지킨 거
태양벗한테
바람벗에게
빗소리한테
열매 맺고 태풍 이겨
굴밤이 익으면
온전히 땅에 돌려 드리리
약속 오롯이 지킨 거
열매가 익는다는 게
굴밤나무 힘만 아니었구나
시월 한창 가을 결 참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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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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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호 시인은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시적으로 풀어내는 데 뛰어난 감각을 가진 중진 작가이다. 그의 시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와 감사, 그리고 삶의 윤회적 철학이 담겨 있다. 특히 자연에서 비롯된 감정과 깨달음이 일상적으로 녹아든 표현은 독자에게 친근하면서도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굴밤이 떨어졌다" 역시 가을의 풍경과 자연의 섭리를 통해 삶의 주기와 약속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시인의 삶에서 얻은 자연과 인간의 연결 고리를 통해 우리가 잊고 지냈던 순환과 맺음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시월 가을 결이 곱다"
가을의 결이 곱다는 표현을 통해 계절의 아름다움을 시적으로 드러낸다. '결'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표면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가을이 가지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강조한다. 시인이 바라본 시월의 가을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깊이 느껴지는 시간과 공간의 질감이다.
"둘레길 모퉁이 드니"
시적 화자가 둘레길을 따라가며 모퉁이를 돌 때의 순간을 담고 있다. 이 표현은 무심코 걷던 길 위에서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찰나의 감동을 상징한다. 모퉁이를 돌아 새로운 시야를 확보하는 순간, 자연이 가진 다양한 면모와 변화를 경험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칠순 굴참나무 영감"
칠순이 된 굴참나무를 영감으로 비유하여 나무의 나이와 지혜를 의인화했다. 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오랜 세월을 지내온 나무의 신성함과 노년의 품위를 상징한다. 나무를 영감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연이 가진 삶의 깊이와 연륜을 인간의 삶과 교차시킨다.
"제 살점 굴밤을 떨궜다"
'제 살점'이라는 표현은 굴밤이 나무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나무가 굴밤을 떨어뜨리는 것은 단순한 열매의 낙하가 아니라 나무의 일부를 내어주는 희생이자 선물로 표현된다. 나무는 자신을 드러내며 열매를 주지만, 이는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을 보여주는 행위다.
"한 되 두되 한말 두말 / 가마니로 떨구었다"
떨어지는 굴밤의 양을 한 되, 두되, 한말, 두말로 나열하여 점차 늘어나는 풍요로움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이는 단순히 열매의 양이 많다는 것을 넘어, 나무가 가진 생명의 힘과 풍요로움, 그리고 그 과실을 나눔으로써 자연이 베풀어주는 은혜를 나타낸다. '가마니로 떨구었다'는 표현은 풍성함을 극대화하며 자연의 관대함을 부각한다.
"사월에 젖꼭지 열매 달며 / 하늘 벗님과 약속 지킨 거"
사월에 열린 젖꼭지 같은 열매는 굴밤의 시작을 의미하며, 하늘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표현은 자연의 순환과 주기에 대한 약속을 나타낸다. 이는 자연의 섭리가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상징하며, 시인의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다.
"태양벗한테 / 바람벗에게 / 빗소리한테 / 열매 맺고 태풍 이겨"
나무가 열매를 맺고 풍랑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태양, 바람, 빗소리와 같은 자연의 요소들을 벗으로 비유한다. 이는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을 나타내며, 나무가 그들의 도움으로 열매를 맺고 태풍을 이겨낸다는 것을 표현한다. 시인은 자연과 자연 사이의 유대감,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을 지켜내는 모습을 진솔하게 담아낸다.
"굴밤이 익으면 / 온전히 땅에 돌려 드리리"
익은 굴밤을 땅에 돌려준다는 표현은 자연의 순환과 삶의 보은을 상징한다. 굴밤이 익는 과정이 마치 자연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며, 나무가 모든 것을 온전히 땅에 돌려준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나타낸다. 이는 곧 삶에서 받은 것을 다시 자연에게 돌려주는 상생의 철학을 표현한다.
"약속 오롯이 지킨 거 / 열매가 익는다는 게 / 굴밤나무 힘만 아니었구나"
열매가 익는 과정이 나무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자연의 섭리와 그 안에서의 협력, 그리고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삶에서도 우리 각자가 스스로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자연의 힘이 더해진 것임을 상징한다.
"시월 한창 가을 결 참 곱다!!."
마지막 행에서 가을의 결이 아름답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며 시를 마무리한다. 감탄사로 끝맺음하여 가을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시 전반에 깔린 자연에 대한 경외와 감사의 감정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백영호의 "굴밤이 떨어졌다"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순환, 그리고 조화로운 관계를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표현한 작품이다. 나무와 열매를 통해 생명과 자연의 힘을 노래하며, 가을의 풍요로움과 그 안에 담긴 자연의 섭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시의 각 행마다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 녹아 있으며, 굴밤나무의 열매를 맺는 과정을 삶의 주기와 비유하여 시인의 깊은 사유를 느낄 수 있다.
전체적으로 시는 자연에 대한 경외와 삶의 본질적인 순환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다. 시적 언어가 가진 이미지와 감정의 흐름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독자로 가을의 결을 느끼게 하며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깊게 사색하도록 만든다. 자연과 삶의 순환, 그 속에서 발견하는 조화로움과 감사의 가치가 고스란히 드러난 시로, 시인은 우리가 잊고 지낸 삶의 이치를 되새겨 주고 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