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Oct 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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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취하다
시인 지영자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잎새의 추락
허무한 죽음이 아니다
편하게 안주할 뿐
제 색깔을 자랑하지 않고
요염한 자태를 숨기고
그리움의 도돌이표 신호를 보낸다
계절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숨 가쁜 변화의 채색
사랑이 익은 무언의 기도
외롭지 않은 침묵의 행렬
헤아릴 수 없는 가을의 현기증
눈부시며 미래를 연다
내 안에 흘러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가을이 무르익는 단풍들의 이야기
가을이 남긴 풍성한 열매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물들어
깊어지는 가을에 취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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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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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자 시인은 한국의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사소한 순간에서 깊은 감정을 포착해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한순간의 정적 속에 깃든 고요한 아름다움과 생명의 흔적을 담아내고 있으며, 이는 그의 삶과 신념이 바탕이 된 것이다. 그는 계절의 순환과 삶의 무상함을 자연의 이미지로 직조해 내면서도 그 속에 담긴 생명과 희망의 기운을 조화롭게 그려낸다. 시적 세계 속에서 가을은 고독과 그리움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시간으로 묘사되며, 이러한 계절의 묘사는 곧 인간의 삶과 감정을 투영한다.
첫 행,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잎새의 추락”에서 ‘잎새의 추락’은 가을의 낙엽을 연상시키며, 이 떨어짐은 생명의 소멸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한 허무가 아닌 생명 순환의 일부로, 자연스러운 안주로 받아들여진다. 이어지는 “허무한 죽음이 아니다 / 편하게 안주할 뿐”은 죽음이란 자연의 섭리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자체로 편안함과 안식을 준다는 작가의 철학적 사유가 드러난다. 이는 모든 생명체가 언젠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고요한 이치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제 색깔을 자랑하지 않고 / 요염한 자태를 숨기고 / 그리움의 도돌이표 신호를 보낸다”에서 낙엽은 그 아름다운 빛깔과 요염한 모습을 스스로 감추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무심하게 보이는 자연이 지닌 깊은 아름다움을 반영하며, 그리움을 나타내는 ‘도돌이표 신호’는 반복되는 그리움의 파동처럼 가을의 감성을 지속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이는 마치 돌아온 가을의 신호와 함께 사라졌던 감정들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한 상징을 지니고 있다.
“계절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 숨 가쁜 변화의 채색”은 가을의 변화무쌍한 풍경과 그 속에서의 시간의 흐름을 묘사한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행위는 계절이 변모하는 과정을 묘사하며, ‘숨 가쁜’이라는 표현은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의 유동성과 함께, 이 짧은 계절 속에서 피어나고 지는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변화는 “사랑이 익은 무언의 기도”와 연결되며, 가을의 완숙한 아름다움과 풍요로움 속에서 사랑의 기도가 익어가는 모습을 암시한다. 기도의 무언성은 가을의 고요함과 내밀한 감정을 담아내며, 동시에 사랑의 성숙함을 은유한다.
“외롭지 않은 침묵의 행렬 / 헤아릴 수 없는 가을의 현기증”에서는 침묵이 단순한 고독이 아닌, 깊은 소통과 공감의 감정을 전한다. 가을의 침묵은 그 안에 수많은 소리와 감정을 품고 있어,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내면적으로는 활기가 가득하다. “가을의 현기증”은 그 변화의 강렬함에 압도당하는 순간을 표현하며, 이러한 현기증 속에서 시인은 눈부신 미래를 바라본다. 이는 변화하는 가을의 혼란과 아름다움이 결국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동력으로 작용함을 의미한다.
“내 안에 흘러들어오는 / 시원한 바람 / 가을이 무르익는 단풍들의 이야기”는 시적 화자의 내면으로 가을이 스며드는 모습을 그린다. ‘시원한 바람’은 가을이 가져오는 청량함과 자유로움을 나타내고, 단풍의 이야기는 가을의 무르익은 시간 속에 담긴 다채로운 삶의 순간들을 말한다. 이는 화자가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가을이 남기는 풍성한 열매들을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물들어 / 깊어지는 가을에 취하고 싶은”에서 시인은 시간이 흐르며 자신의 내면도 자연처럼 물들어감을 느낀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드러내며, 가을이라는 계절이 삶 속에서 깊이 스며들어 감성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취하고 싶은’이라는 표현을 통해 시인은 가을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고, 그 아름다움에 동화되고자 하는 소망을 표한다.
지영자 시인의 이 시는 단순한 계절의 묘사를 넘어, 자연과 인간의 일체감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드러낸다. 가을의 낙엽 하나하나에 담긴 생명의 가치와 순환의 의미를 발견해 내며, 인간의 삶과 자연의 이치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표현상의 특징으로는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그 안에 깃든 생명의 빛깔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점이 두드러진다. 또한 반복적인 구조와 리듬감 있는 언어로 가을의 흐름과 생명력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주제적으로는 자연의 생명력과 순환, 그 안에 깃든 인간의 감정과 사유를 조화롭게 담아내며, 일상의 소멸과 재생을 초월한 영속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삶의 변화와 무상함을 고요하게 관조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깊은 희망과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지영자 시인의 감각은,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소중한 순간들을 섬세하게 담아내며 독자에게 가을에 취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느껴지는 감정의 변화를 통해 삶의 깊이와 가치를 일깨우는, 단순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