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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Oct 24. 2024

한겨울 주전부리

김왕식

  








                    한겨울 주전부리

                                     文希 한연희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뼈가 부러지거나 진보라색 멍이 든다.
떨어진 기억 없이 허벅지가 진보라색이어서 깜짝 놀랐다. 크고 작은 멍이 피부 어딘가 옮겨 다니며 숨어 산다.
혈전용해제를 포함하여 갖가지 약을 먹어 그런가 싶지만 이해하긴 어렵다.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려고 은행나무 아래로 갔다.

 뒤뜰 은행나무 아래 샛노란 은행이 수북하다.
얘네들은 사뿐히 내려앉은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노랄 리가 없다.
낙법을 배웠을까? 아니면 잎부터 두툼하게 깔아놓아 사뿐히 내려앉았을까?
 주변에 핀 쑥부쟁이와 용담, 배초향꽃이 은행의 아픔을 껴안고 있어서 청보라색일까?
 나의 아픔을 샅샅이 아시는 주님은 진보라색이겠지?
  공룡시대 이전부터 현재까지 살아남아 화석 생물이라 불리는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장수하고 싶은 맘이 어딘가에 숨어 있는지 그 아래 앉아 있으면 기분이 가뿐하다.

 십여 년 전 뒤뜰을 정리할 때 사람들은 은행나무가 있는 언덕을 허물어 남새밭을 만들면 요긴하게 사용할 거라고 조언을 해줬다.
나는 효용가치보다 삶의 질을 높여줄 쉴 공간이 간절했다. 언덕 위에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를 살리기 위해 허무는 대신 돌 축대를 쌓고 위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을 만들었다. 구린내 풍기는 갓 떨어진 은행을 껍질 벗겨 여러 번 씻어 구우면 연한 색이 초록색으로 변하면서 젊은이 피부처럼 탱탱하다. 쫀득한 식감이 뛰어나고 맛은 일품이다. 저절로 건강한 기운이 스며들 것만 같은 은행을 하루 분량씩 주워다가 식탁에 올리는 호사를 해마다 누린다.

  예전에 살던 과천 중앙동은 양쪽 가로수가 굵직한 은행나무다. 시월이 되면 낭만을 즐기도록 떨어진 은행잎을 일정 기간 쓸지 않는다. 언니와 나는 새벽에 은행알이 굵은 나무를 찾아 잔뜩 주워 냇가에 구린내를 흘려보내는 일이 일종의 가을걷이였다.
 햇살 아래 하얗게 말려 한겨울에 구운 은행은 시부모님이 아껴 드시던 주전부리였다. 남편은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은행 굽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구운 은행이 쌓이면 누가 먹을까 봐 한입에 톡 털어 넣고 피식 웃는다.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안 좋다더라. 얘기해도 소용없다. 남편이 은행을 먹을 때마다 일곱 개씩 귀하게 드시던 시부모님이 생각난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문희 한연희의 ‘한겨울 주전부리’는 일상의 작은 기억과 자연 속에서의 단상을 통해 인간의 삶과 감정을 깊이 있게 묘사한 글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생긴 진보라색 멍은 단순한 신체적 상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삶에서 겪는 무거운 마음의 상처와도 연결된다. 허벅지에 멍이 들었음에도 떨어진 기억 없이 그 현상을 맞이하는 장면은 우리의 일상에서 때때로 이유 모를 감정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뒤뜰의 은행나무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은 이 글의 중심적인 이미지다. 사뿐히 내려앉은 은행알의 묘사는 인생의 고통을 이겨내며 부드럽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 낙법을 배워 가볍게 내려앉은 듯한 은행알은 삶의 고난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제시하는 듯하다. 동시에, 주변의 청보라색 꽃들이 은행의 아픔을 끌어안고 있는 장면은 인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는 자연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며, 은행나무가 가진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도 잘 살려내고 있다. 공룡 시대를 지나 현존하는 은행나무는 장수와 인내의 상징으로, 글 속에서 인간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내적 욕구를 보여준다. 언덕을 허물지 않고 은행나무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는 작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 효용성보다는 질을 중시하는 태도를 잘 드러낸다.

과천에서의 은행 주워 오던 추억과 은행을 구워 시부모님께 드리던 일상적인 장면들은 따뜻한 가정적 사랑과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특히 남편이 은행을 먹으며 시부모님을 떠올리는 장면은 세대 간의 연결성과, 과거의 소중한 순간들이 어떻게 현재의 삶 속에서 되살아나는지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글은 자연, 가족, 그리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작고 소소한 기억들을 통해 인생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전한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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