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내 슬픔을 볼 수는 없으리 ㅡ 시인 김신영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Dec 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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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내 슬픔을 볼 수는 없으리
김신영
그대 내 슬픔에
발을 담그려 하여
심장 속에
더운 피가 흐르고
오늘 살이 붉다
그러나 그대
결코 내 슬픔을 볼 수는 없으리
내 슬픔을 보려면.
백여 개의 계곡에
내가 함정에 빠뜨린 백골들이
붉은 혀로 타오르는 심장의 늪을 지나 하늘거리는 섬모의 숲을 지나
지질과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불쾌한 엽기가 폭포같이 뚝뚝 떨어지는 허파의 숨구멍을 무수히 지나
오욕으로 물들이는 효소를 들이마시며 소화액이 영롱하게 보석처럼 반짝일 때 그때
내 슬픔을 볼 수 있으리
백일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백안이 되어 내 안에 돋친 검은 가시를
볼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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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시인 김왕식
ㅡ
김신영 시인은 삶의 깊이를 통찰하며 인간의 내면에 깃든 슬픔과 고통을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형상화하는 작가이다.
그는 한국문학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며, 언어의 힘을 통해 삶의 진실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내 슬픔’을 타인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전제하며, 인간의 고통이란 단순한 감각적 경험이 아니라 생리적, 심리적, 철학적 층위에서 복합적으로 작용함을 강렬한 이미지와 생동하는 묘사로 드러낸다.
“그대 내 슬픔에 /
발을 담그려 하여”
이 행에서 시인은 슬픔이라는 추상적 감정을 물처럼 구체화하여 표현한다. 타인이 슬픔의 영역에 발을 들이려는 시도로 시작되지만, 이는 단순한 동정 이상의 행위로 읽힌다. 발을 담근다는 표현은 물리적 참여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행위를 함의한다.
“심장 속에 /
더운 피가 흐르고 / 오늘 살이 붉다”
슬픔을 경험하는 주체의 생리적 반응을 묘사한다. 더운 피와 붉은 살은 생명력을 상징하는 동시에, 슬픔이 인간의 심리뿐 아니라 육체에도 깊이 새겨짐을 강조한다. 슬픔은 단순히 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온몸을 뒤흔드는 생리적 경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대 /
결코 내 슬픔을 볼 수는 없으리”
타인의 슬픔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단언이다. 이 행은 시 전체의 주제를 함축하며, 슬픔이란 본질적으로 고유하고, 타인이 감히 전유할 수 없는 영역임을 선언한다.
“내 슬픔을 보려면.”
이 한 행은 독립적인 호흡으로, 독자를 정지시킨다. 마치 문을 열어 놓은 듯한 이 짧은 문장은 슬픔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준비와 의지를 요구한다.
“백여 개의 계곡에 /
내가 함정에 빠뜨린 백골들이”
이 구절은 과거의 고통과 그로 인해 형성된 슬픔의 누적된 깊이를 암시한다. ‘백골’은 인간의 끝없는 고뇌와 비극을 형상화하며, 슬픔이 단순한 일회적 경험이 아님을 나타낸다.
“붉은 혀로 타오르는 심장의 늪을 지나”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슬픔의 본질을 묘사한다. ‘심장의 늪’은 슬픔의 고착된 장소를 의미하며, ‘붉은 혀’는 슬픔이 고통과 분노로 확장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하늘거리는 섬모의 숲을 지나”
‘섬모의 숲’은 세포적이고 미세한 존재의 일부를 나타낸다. 이는 슬픔이 개인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스며들어 있음을 드러낸다.
“지질과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
불쾌한 엽기가 폭포같이 뚝뚝 떨어지는”
여기서는 인간의 생물학적 구성요소를 통해 슬픔을 물리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슬픔이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유기적인 연결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허파의 숨구멍을 무수히 지나”
숨쉬기조차 어려울 만큼의 고통을 암시하며, 슬픔이 호흡처럼 필수적이고, 삶의 기본적인 리듬에도 영향을 미침을 나타낸다.
“백일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백안이 되어”
백안(白眼)은 순수와 무구함을 상징하며, 슬픔이 그 모든 순수함을 파괴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김신영 시인의 시는 슬픔이라는 인간 경험의 본질을 탐구하며, 그것이 단순한 감정적 반응을 넘어 생리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에서 작용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의 가치체계는 인간의 고통과 슬픔이 개인의 고유한 경험으로서 타인이 온전히 이해하거나 치유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임을 강조한다. 이 시는 슬픔이란 단순히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 깊고 복합적인 경험임을 시사한다. 이는 작가가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고 고통 속에서도 인간다움과 생의 진실을 탐구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작품의 미의식은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와 언어를 통해 슬픔의 본질을 형상화하는 데 있다. 시인은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이미지를 통해 슬픔을 구체화하며, 이를 통해 독자가 감각적으로 슬픔을 체험하도록 만든다. '심장의 늪, ' '섬모의 숲, ' '허파의 숨구멍'과 같은 표현은 인간의 생리적 본질에 뿌리내린 슬픔의 존재를 강조하며, 언어의 경계를 확장해 감각적이고 철학적인 심상을 동시에 제공한다.
특히, 작가의 미의식은 단순한 슬픔의 묘사를 넘어, 그것을 해부하고 분석하며, 고통의 층위에서 진리를 발견하려는 시도에 있다.
과도한 묘사와 표현의 복잡성이 때로는 독자의 몰입을 저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절제와 균형이 이루어진다면, 그의 시는 더욱 보편적 감동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슬픔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작가의 철학적 통찰과 미적 감각을 고스란히 담아낸 뛰어난 시적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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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영 교수 약력
시인, 문학박사
충주출생. 중앙대 졸업, 1994년 동서문학> 등단,
문학 고을 등단 심사위원 시집 [화려한 망사 버섯의 정원 ] (문학과 지성사) 외,
시 창작론 집 [ 아직도 시를 배우지 못했느냐] (행복에너지),
마술상점(시인수첩, 2021),
가천대 독서지도사과정 책임교수
현, 한국문인협회 지부
이천문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