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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01. 2025

첫새벽 ㅡ 시인 한강

김왕식







                                첫새벽


                                           시인 한강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어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강 시인의 '첫새벽'은 절망과 슬픔을 정갈하게 다듬어 첫새벽에 바치는 독특한 서정성과 절제된 미학을 보여준다. 이 시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깊은 철학적 성찰을 결합하여 독자에게 강렬한 울림을 준다. 한강 작가가 꾸준히 탐구해 온 인간 존재의 고독과 희망의 여지를 담아내며, 동시에 도시적 공간과 자연적 감각을 결합한 묘사로 그녀만의 미의식을 드러낸다.

시의 첫 구절 “첫새벽에 바친다 내 / 정갈한 절망을”은 시인 특유의 행간의 걸침 표현을 통해 절망이 단순한 비관이 아닌, 심미적이고 정제된 것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절망'은 절실하면서도 담백한 언어로 승화되어, 독자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시인은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도시적 공간 속 고독과 생존의 긴장감을 그려낸다. “감은 머리칼 /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 영하의 바람”은 한겨울 새벽의 날카로운 풍경을 선명히 묘사하며, 이는 독자에게 차가운 공기의 실질적 감각을 전달한다. 또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라는 구절은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을 은유하며, 현대인의 고립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에서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특성이 결합된다. 이 시는 새벽이라는 특정 시간대에 집중하며, 어둠과 차가움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는 시적 긴장감을 더하며, 한강 작가의 정밀한 관찰력과 철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마지막 구절 “슬픔에 바친다 내 / 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시적 화자의 몸을 통해 형상화한다. 슬픔과 고동 소리는 동시에 삶의 비극성과 생명력의 고귀함을 암시하며, 인간 존재의 이중성을 탐구한다.
이는 한강 작가가 일관되게 다루어온 주제로, 그녀의 문학적 철학인 “삶과 죽음의 어름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담아낸다.

한강의 '첫새벽'은 절망과 슬픔, 도시적 고독을 정갈한 언어와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는 새벽이라는 시간적 배경 속에서 인간의 내적 고뇌와 외부 환경의 차가움을 긴밀히 엮어낸다.
 한강의 시는 단순한 정서적 표현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적 고뇌와 희망을 섬세하게 탐구하며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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