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1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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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허리 위에 핀 희망
허리가 땅에 닿을 듯이 굽은 노인은 리어카에 폐지와 고철을 가득 싣고 길을 걷고 있었다. 숨이 턱에 찰 만큼 힘겨운 걸음이었다. 낡은 고무신은 바닥이 다 닳아 맨발이나 다름없고, 허리는 이미 한없이 구부러져 있었다. 리어카 바퀴는 삐걱거리고, 손아귀에 쥔 손잡이는 거칠게 닳아 있었다. 그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땀에 젖은 옷자락은 바람에 펄럭였지만, 그 바람조차 그의 걸음을 가볍게 해주지 못했다.
"어휴, 어쩌다 저리 됐누. 자식들은 없는 겨?"
길가에 서 있던 중년 여인이 혀를 끌끌 찼다. 옆에 있던 노인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요즘 자슥들이 부모 안 돌보는 게 하루이틀인가."
사람들은 그렇게 중얼거리기만 했다. 누구 하나 나서서 그 노인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마치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한숨과 혀 차는 소리만 가득했다. 노인은 리어카를 질질 끌며 차도로 들어섰다. 그 순간, 자동차들이 경적을 요란하게 울려댔다.
"빵빵! 저거 뭐여? 저 양반 차도로 왜 들어온겨!"
운전자들은 창문을 내리고 소리쳤지만, 노인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저 리어카의 무게에 짓눌린 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차들은 옴짝달싹 못하고, 사람들은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경적 소리만 거리에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책가방을 멘 사내아이 몇 명이 우르르 달려왔다. 아직 교복이 덜 맞는 듯한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말없이 리어카 뒤편에 달라붙어 힘껏 밀기 시작했다.
"으쌰! 좀만 더 밀어!"
"형, 이쪽으로 좀 돌려!"
어린 손들이 삐걱거리는 리어카를 밀자, 무거운 수레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노인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구부러진 허리가 더 휘청거렸지만,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얘들아, 고맙다. 고맙다잉…"
그의 목소리는 힘없이 떨렸지만, 아이들은 그냥 웃으며 리어카를 밀었다. 어느새 차도에서 벗어난 리어카는 인도로 올라갔다. 경적 소리도, 혀 차는 소리도 멎었다. 대신 아이들의 숨소리와 노인의 연신 고맙다는 말만 남았다.
멀찍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긴 머리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수레를 미는 모습을 프레임 안에 담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어느 지역 신문에 나올까?"
소녀는 혼잣말을 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은 세상을 향한 작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 거리의 풍경은 늘 그랬다. 구부러진 허리를 가진 노인이든, 혀를 차는 어른들이든,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이든. 그러나 오늘, 어린 학생들이 보여준 작은 손길이 이 거리의 공기를 달리 만들었다. 무심히 지나치던 사람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숨과 혀 차는 소리가 아닌, 조용한 울림이 거리 위를 감쌌다.
희망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작은 손길, 누군가를 향한 따뜻한 마음 하나였다. 청소년들의 손끝에서 피어난 희망이 오늘 이 거리의 무게를 덜어주었다.
한편으론 씁쓸함도 남았다.
왜 어른들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을까? 혀를 차고, 한숨만 내쉴 뿐, 몸을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방관자라는 말이 그렇게도 무거운 이유였다.
어쩌면 청소년들이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순수함. 그래서 그들의 행동은 더욱 빛났다.
노인은 다시 리어카를 끌고 천천히 길을 나섰다. 여전히 무거운 짐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가벼웠다. 아이들의 손길이 그 무게를 덜어주었으니까.
그 장면을 담은 소녀의 사진은 어쩌면 어느 날, 작은 지역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릴지도 모른다. "청소년의 따뜻한 손길, 거리의 희망이 되다."라는 제목과 함께.
그 사진이 실리든 말든, 중요한 건 이미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그날 그 거리의 공기와, 작은 손길이 만들어낸 변화는.
희망은 그렇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