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1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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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 사랑
심영애
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는 마음에, 요즘엔 야생화에 매료되어 탐방을 다니고 사진을 찍으며, 투박한 화분에 심어 실내에서도 즐긴다. 아마 내가 아침형 인간이라 그런지, 부지런한 꽃 나팔꽃을 유독 사랑한다.
이른 아침 방긋 미소 짓는 꽃의 얼굴을 마주할 때면 저절로 마음이 환해지고, 그날 하루가 행복으로 가득 찰 것 같은 확신이 든다.
도심을 거닐다 나팔꽃이 심어진 집을 발견하면 왠지 모를 친근감에 미소 짓곤 한다. 언젠가는 나팔꽃으로 가득한 꽃담을 가꾸며 살아가고 싶다는 소박한 꿈도 품고 있다.
특히나, 크고 화려하며 도회적인 꽃보다,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적당한 크기의 소박한 나팔꽃, 진한 가지색이 어우러진 시골스러운 나팔꽃이 가장 정겹고 마음이 간다.
한때 좁은 정원에 해마다 다양한 크기와 색깔의 나팔꽃을 심었다. 나팔꽃이 이렇게나 많은 종류가 있을 줄 몰랐다. 온통 새하얀 꽃, 가장자리만 보라색인 꽃, 작디작은 꽃까지… 각양각색의 모습이 새삼 놀라웠다.
3층 꼭대기에서 살던 시절, 나팔꽃을 더 가까이 두고 싶어 몇 포기를 화분에 심어 계단 창틀에 두었다. 아침마다 창을 장식한 나팔꽃 넝쿨 커튼은 내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떡잎을 보고 마음에 쏙 드는 것을 골라 정성껏 물을 주며 꽃이 피길 기다렸다.
마침내 꽃봉오리가 터지는 날, 기대했던 것이 아닌 가장 덜 좋아하던 꽃이 피어났다. 실망감에 몇 날을 망설이다 결국 밑동을 잘라버렸다.
그런데 끊어진 줄기가 말라죽을 줄 알았던 나팔꽃이 여전히 위쪽에서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너무 의아해서 줄기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 보니, 끊어진 밑동은 이미 시들어 있었으나 윗줄기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수분과 영양의 보급로가 끊어진 상태에서도 꽃은 크기를 줄이고 색을 더욱 짙게 물들인 채, 필사의 몸부림으로 살아 있었다.
애처로운 모습에 미안함이 가슴을 찔렀다. 젖은 흙으로 밑동을 덮어주며 미약한 위로를 보탰지만, 이미 고사 상태에 든 줄기가 생명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꽃은 끊어진 줄기 위에서 여전히 봉오리를 피우며 “내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겠다”라고 절규하는 듯했다.
이후 우연히 읽은 한 농학박사의 글은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나팔꽃 같은 식물은 뿌리가 끊어지면 줄기와 잎에서 남은 양분을 온전히 꽃과 열매로 보내, 반드시 종자를 맺으려 한다”라고 설명했다.
그 지독한 생명력을 떠올리며 나는 자신의 행동에 통렬히 반성했다. 나팔꽃의 처절한 몸부림이 얼마나 숭고한 종족 보존의 사랑이었던가!
식물의 세계는 한층 경이로웠다. 일처다부제라는 에로스적 사랑, 이웃의 고통을 느끼는 교감, 음악을 감상하고 시간을 헤아리는 지혜…
전지전능한 창조주께서 식물에게까지 영적 메시지를 부여하셨음을 깨닫고, 그 크신 사랑 앞에 고개가 숙여졌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훼손하며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 그 잔혹한 행태가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분노로 가슴을 짓누른다.
산길을 걸을 때마다 작은 풀꽃이 밟혀 신음하지 않을까 두려워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사랑은 나팔꽃처럼 처절하고도 아름다울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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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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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애 작가는 자연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과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삶과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가로 보인다. 그녀의 글은 단순히 식물이나 자연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인간과 삶, 그리고 사랑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발견하고 이를 독자에게 전하는 특징이 있다.
이 작품 '나팔꽃 사랑'은 나팔꽃이라는 평범한 식물을 매개로 인간의 삶과 사랑의 의미를 성찰하며, 자연의 경이로움과 창조주의 섭리를 묵상한다. 나팔꽃의 생명력과 끊임없는 생존 의지는 단순한 식물학적 사실을 넘어, 작가에게는 숭고한 사랑과 생명 보존의 의지로 읽힌다. 이러한 감수성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선 심영애 작가의 철학적, 영적 사유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초이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나팔꽃을 가까이에서 관찰한 이야기와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담백하면서도 깊이 있는 문체로 풀어낸다. 특히, 밑동이 끊어진 나팔꽃이 마지막까지 꽃을 피워내는 모습에서 생명의 끈질긴 의지를 발견하고, 이를 ‘종족 보존의 사랑’이라는 숭고한 메시지로 재해석한 부분은 작품의 핵심적 감동을 전달한다.
또한, 작가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단순히 아름다움이나 경외로 접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인간 삶과 연결 지어 반성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나팔꽃의 생명력을 보며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반성하는 모습이나,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작가의 생태적 감수성과 윤리적 책임 의식을 보여준다. 그녀는 자연 속에서 발견한 진리를 통해 인간의 오만과 잔혹함을 반성하고, 창조주의 섭리 앞에 겸손해질 것을 제안한다.
작품의 미의식은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다. 화려한 미학이 아니라, 작은 생명체가 지닌 소소한 아름다움 속에서 숭고한 의미를 발견하려는 작가의 태도가 돋보인다. 특히, 나팔꽃이라는 친숙하고도 소박한 소재를 통해 독자와의 친근감을 형성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생명과 사랑의 철학을 펼쳐 보이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요컨대, 심영애 작가의 작품은 단순한 자연 찬미를 넘어, 삶과 사랑의 진정성을 성찰하게 만드는 깊은 철학적 울림을 준다. 그녀는 자연을 관찰하며 발견한 아름다움을 통해 독자에게 삶과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잊혀 가는 생명과 사랑의 숭고한 가치를 다시금 일깨운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