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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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切親), 그 이름의 무게
김왕식
우리는 종종 가장 가까운 친구를 '절친'이라 부른다. 이 단어의 어원을 알게 되면 잠시 멈칫하게 된다. '절친'은 단순히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서 유래되었으며, '싸움에서 패배한 사무라이가 할복할 때 가장 가까운 친구가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목을 베어주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이 '절친'의 유래를 되짚어 보면, 그 속에 담긴 관계의 무게와 희생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사람들은 흔히 절친이라는 말을 가볍게 사용한다. 단순히 자주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친구를 절친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관계가 과연 죽음을 나눌 만큼의 깊이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선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사상가 함석헌 옹은 “구명보트에 한 자리만 남았을 때, 그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이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다. 생명을 나누는 관계, 그것이 진정한 절친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가 ‘절친’이라는 단어를 가볍게 사용하며 관계를 포장할 때, 그 안에는 진실한 우정보다는 가벼운 교류만 남을지도 모른다. 절친이란 말속에는 목숨까지 나눌 수 있는 깊은 희생과 믿음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이 단어는 단순히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친구를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이 단어를 쓸 때는 그 관계의 본질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친구란 단어는 곁에 있는 사람을 뜻하지만, 절친은 그 관계를 넘어선다. 어려움 속에서 서로를 지탱하고, 필요한 순간에는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관계, 그것이 절친의 의미다. 단순히 서로에게 편안한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성장시키고 지탱하는 관계야말로 진정한 절친이다. 우리가 절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그 관계는 단순한 교우의 차원을 넘어선다.
요즘 사람들은 SNS 친구 목록의 숫자로 관계를 판단하기도 한다. 그런 관계 속에서 구명보트에 한 자리 남았을 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할 절친을 떠올릴 수 있는가? 함석헌 옹의 물음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진정한 우정은 단순히 즐거움을 나누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의 생명과 고통까지도 함께하는 깊은 연대를 뜻한다.
결국 절친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어원을 넘어선다. 이는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대하는 태도, 우정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만든다.
절친이란 목숨을 걸 수 있는 관계다. 그런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큰 재산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절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사의 순간에서 나를 떠올리고, 자신의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내가 그들에게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렇게 서로를 위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며, 그것이야말로 ‘절친’의 무게를 감당하는 길이다.
누구나 절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안의 깊은 의미를 곱씹어본 사람은 드물다. 우리가 절친이라 부르는 그 사람이 과연 그런 희생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또 그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정이란 나를 넘어선, 우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절친이란 그 우정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을 뜻한다.
이제는 ‘절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전에 그 무게를 먼저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ㅡ
지금
내 곁에
절친은 있는가?'
한 켠
내가
그에게 절친이 될 수 있는 가를
생각하면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