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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와 동치미 국물

김왕식









고구마와 동치미 국물






겨울이면 양지바른 툇마루는 할머니의 자리였다. 찬바람을 등지고 따스한 햇살을 가슴에 품으며, 투박한 손으로 고구마를 깎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칼끝이 고구마 껍질을 부드럽게 따라갈 때, 할머니의 얼굴에도 한 줌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 손은 얼마나 많은 날들을 살아왔을까. 굳은살 가득한 손끝으로도 섬세히 껍질을 벗겨내던 모습은, 세상을 살아온 지혜와 인내의 상징처럼 보였다.

툇마루 위에 둘러앉아 동치미 국물에 담가 먹던 고구마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정성, 그날의 햇살, 그리고 소박한 웃음들이 모두 어우러져 있던 시간의 맛이었다. 한입 베어 문 고구마는 그 순간 우리의 입속에서 달고 따스하게 퍼졌고, 동치미 국물의 시원함이 뒤따랐다. 그 맛은 단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를 더 깊이 기억하게 했다.
“옛날에는 말이다...”로 시작하던 이야기들은 고구마 한 조각, 동치미 한 모금과 함께 천천히 풀어져 갔다. 이야기는 늘 구수했고, 듣고 있으면 삶의 한 조각을 받아들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툇마루, 그 할머니의 자리는 이제 빈 채로 남아 있다. 툇마루 위에 놓인 햇살은 여전히 따스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고구마를 깎는 손길은 더 이상 없다. 할머니는 어느 그믐밤, 별빛 아래에서 조용히 세상과 이별하셨다. 그날 밤 별들은 평소보다 더 또렷하게 빛났고, 마치 할머니를 배웅하려는 듯 서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 별들 속에 흩어졌고, 이제 그 빛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은은히 들려온다.

고구마의 달콤함과 동치미의 시원함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그 맛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진다. 툇마루에 둘러앉아 나누던 소박한 하루는 이제 추억 속의 그림이 되었고, 별빛 아래 잠든 할머니는 그 그림의 가장 빛나는 부분으로 남아 있다.

별과 함께 계시는 할머니를 생각할 때면,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추운 겨울이면 툇마루에 앉아 햇살을 쬐던 기억, 손끝으로 정성스럽게 깎던 고구마, 그리고 함께 나눴던 이야기는 단순한 일상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었다. 그것은 추억의 한 장면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이루는 뿌리이며, 시간 속에서 이어져 온 연결고리였다.

오늘 밤 별을 바라보며, 할머니와 나누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본다. 따스했던 툇마루의 햇살과 달콤했던 고구마,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감싸 안아주던 할머니의 온기가 여전히 느껴지는 것 같다. 별빛이 닿는 곳 어디선가,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만 같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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