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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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루의 겨울
최호 안길근
청람루의 겨울은 고요하고도 깊다. 멀리 소리산이 푸른 능선을 펼쳐 놓고, 그 아래 작은 마을 장심리는 숨을 고르듯 조용히 겨울을 맞이한다. 문을 열고 마당에 나서면, 바람이 살을 에는 듯 차갑지만 맑고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아침이다. 밤새 내린 눈이 장독대 위에 소복이 쌓여 있고, 울 뒤 옹달샘가엔 늙어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소나무는 오랜 세월을 견뎌 온 노거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낮추며 인내했을 나무.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그날, 그 아래에 앉아 바람이 일으킨 소나무 향을 맡았던 기억이 난다. 푸른 솔잎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무는 더 늙고 몸이 휘었지만,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겨울에도 변함없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마치 오랜 벗처럼, 마을을 지켜보는 듯하다.
눈 덮인 청람루 뒤뜰로 산꿩 한 쌍이 내려온다. 까투리가 식솔을 거느리고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다. 눈밭에서 작은 먹이를 찾아 쪼아 먹는 모습이 어쩐지 애틋하다. 이 겨울을 어떻게 견디려는 것일까. 자연의 이치는 어미가 새끼를 돌보는 데서도 변하지 않는다. 차가운 눈 속에서도 따스한 생명의 온기가 흐르고 있다.
청람루 한 켠 작은 텃밭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제는 흙이 얼어붙어 숨을 죽인 땅. 한때는 푸른 채소들이 자라고 꽃들이 피던 곳이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질퍽한 눈과 함께 서릿발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대지는 겨울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을 것이다.
멀리 뒷마을에서 저녁밥 짓는 내음이 풍겨온다. 온종일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그 향기에 스르르 녹는다. 뜨끈한 아랫목, 갓 지은 밥 한 공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찌개 한 냄비. 겨울 저녁, 마을의 삶은 그 작은 것들로 가득 채워진다.
겨울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화려한 봄이나 열정적인 여름, 풍요로운 가을과는 다르게, 겨울은 가만히 기다리는 계절이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하지만, 실은 생명의 기운이 땅속 깊이 스며들어 다시 올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청람루의 겨울도 그러하다. 깊고 조용한 시간 속에서, 바람과 눈, 산과 나무, 마을 사람들의 온기가 어우러진다.
밤이 되면 하늘은 더욱 맑아지고, 별들이 총총히 빛난다. 그 아래에서 청람루는 하얀 눈 속에 묻힌 채 조용히 숨을 고른다. 겨울밤의 적막함이 쌓이는 시간. 그러나 이 고요함 속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또다시 따스한 봄이 올 것임을 안다.
청람루의 겨울은 그저 추운 계절이 아니다. 그것은 쉼의 시간이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절이고,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다. 지금 이 눈 내린 마당과, 늙은 소나무와, 산꿩이 내려앉은 풍경을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싶다. 겨울이 지나고 다시 바쁜 계절이 오더라도, 이 고요하고도 따스한 기억은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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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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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길근 작가의 '장심리 청람루의 겨울'은 단순한 계절의 묘사를 넘어, 자연 속에서 삶을 성찰하는 한 인간의 깊은 사유가 깃든 서정적 산문이다.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지는 이 글에서 작가는 청람루에 깃든 겨울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내면서도, 자연이 품은 철학적 의미와 자신의 삶의 태도를 조용히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작가의 가치관이다. 청람루는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에게 쉼과 성찰의 장소이자, 자연 속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조용히 살아가는 안식처이다. 그는 장심리 청람루의 겨울을 묘사하며, 그 안에서 순응하고 적응하는 삶을 보여준다.
늙은 소나무의 휘어진 모습, 눈 속에서 먹이를 찾는 산꿩, 얼어붙은 텃밭의 숨결, 바람에 몸을 낮추며 살아온 소나무처럼, 작가 또한 자연의 일부로서 자신을 내려놓고 그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자 한다. 이는 자연 예찬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삶의 방식임을 강조하는 작가의 철학적 태도를 보여준다.
이 글은 겨울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외려 겨울이라는 시간을 통해 ‘기다림’의 미학을 이야기한다.
“겨울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화려한 봄이나 열정적인 여름, 풍요로운 가을과는 다르게, 겨울은 가만히 기다리는 계절이다.”
이 문장에서 드러나듯, 겨울은 멈춘 듯 보이지만, 실은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작가는 겨울이 추위의 계절이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얼어붙은 땅속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생명처럼, 작가 또한 겨울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기다림의 미학은 작가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되며, 그의 글에 고요하지만 깊은 울림을 더한다.
안길근 작가의 문장은 마치 한 편의 시와 같다. 절제된 언어 속에서도 서정이 흐르고, 묘사를 넘어 감각적으로 풍경을 체험하게 한다.
“멀리 뒷마을에서 저녁밥 짓는 내음이 풍겨온다. 온종일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그 향기에 스르르 녹는다.”
이 문장에서 ‘저녁밥 짓는 내음’은 후각적 경험을 넘어, 삶의 따뜻한 온기와 가족의 정을 떠올리게 한다. 한겨울, 차가운 바람 속에서 이 냄새는 단순한 향기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 속에서 삶을 지속해 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또한, ‘스르르 녹는다’라는 표현은 겨울의 차가운 정경과 대비되며, 독자로 온기의 감각을 직접 느끼게 한다.
작가의 글이 주는 아름다움은 바로 이러한 시적 감각에서 비롯된다. 사소한 순간까지도 감각적으로 포착하며, 그 안에서 따뜻한 삶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자연만의 묘사가 아니다. 작가는 자연을 바라보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의 삶과 존재를 성찰한다.
“청람루의 겨울은 그저 추운 계절이 아니다. 그것은 쉼의 시간이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절이고,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다.”
작가는 겨울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본다. 그리고 겨울의 고요함 속에서 인간의 삶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연은 그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연결된 존재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장심리 청람루의 겨울'은 자연과 인간, 시간과 기다림, 고요함과 온기가 어우러진 서정적 산문이다. 안길근 작가는 겨울이라는 계절을 통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되새기고, 그 속에서 기다림의 미학과 존재의 의미를 탐색한다. 그리고 이를 시적인 감각과 절제된 문장으로 풀어내며, 독자로 깊은 울림을 느끼게 한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문득 청람루의 겨울을 직접 마주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겨울 속에서 잊고 지낸 소중한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마치 오래된 벗을 만난 듯, 글 속 풍경이 조용히 마음에 스며든다. 그것이 바로 안길근 작가의 문장이 지닌 힘이자, 그의 글이 보여주는 삶의 미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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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길근 작가님께
안녕하십니까, 작가님.
저는 우연히 작가님의 글, '장심리 청람루의 겨울'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한 독자입니다. 작가님께서 자연 속에서 살아가며 남긴 기록이 저에게는 단순한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깊은 사색과 삶의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한 편의 철학이었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TV 프로그램 자연인을 통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부러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 속에서 작가님의 이야기를 접한 순간, 단순한 동경을 넘어 한 편의 철학을 배운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바쁜 도시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자연과 멀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잊어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그곳에는 빌딩과 광고판이 가득하고, 가끔 바람이 스쳐 지나가도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조차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 저에게 작가님의 글은 마치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에게 내어준 따뜻한 차 한 잔 같았습니다.
작가님께서 묘사하신 장심리 청람루의 겨울은 단순한 계절의 기록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태도였습니다.
“겨울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저도 모르게 글을 읽는 속도를 늦추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천천히 음미하게 되었습니다. 바쁘게 살아온 저에게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그저 막막한 시간이었는데, 작가님의 글을 통해 겨울이 기다림의 계절이며,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 덮인 장독대 위로 시간이 쌓이고, 늙은 소나무가 조용히 그림자를 드리운 풍경 속에서 작가님은 묵묵히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계시겠지요. 까투리가 식솔을 거느리고 청람루 뒤뜰로 내려오는 모습, 질퍽한 텃밭을 밟을 때 들려오는 서릿발 바스러지는 소리, 그리고 저녁이면 마을에서 풍겨오는 따뜻한 밥 짓는 내음까지—이 모든 장면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다. 흔히들 자연을 그저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바라보지만, 작가님께서는 자연이 주는 위로와 가르침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는 작가님의 글에서 자연을 대하는 겸손한 태도를 보았고, 그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발견하였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자연 속에서의 삶이 때로는 외롭거나 힘들지는 않으신가요? 겨울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온 마을이 하얀 적막에 싸일 때면, 문득 도시의 불빛과 사람들의 온기가 그리워질 때도 있으실까요? 아니면 그 적막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평온을 느끼시는지요?
저는 아직 도시에서의 삶을 떠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작가님처럼 자연 속에서 나만의 청람루를 만들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계절이 변하는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삶. 그곳에서는 더 이상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하루를 살아가게 되겠지요.
TV 프로그램 자연인에서 작가님의 삶을 보며 ‘언젠가는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만 하던 제가, 작가님의 글을 읽고 처음으로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의 글은 그저 자연을 찬미하는 산문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철학이었고, 저에게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 이야기였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장심리 청람루를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휘어진 소나무 아래 서서 솔향을 맡아보고, 눈 덮인 마당에 발자국을 남기며 서릿발 밟히는 소리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녁이면 마을에서 풍겨오는 따뜻한 밥 짓는 냄새를 맡으며, 작가님처럼 조용히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작가님께서 그려주신 겨울은 기다림과 성찰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자연 속에서 평온한 삶을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2025년 어느 겨울날
도시에서 자연을 꿈꾸는 독자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