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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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향기 속으로
정용애
우리 집은 바닷가에 있었다. 아카시아 나무와 무화과나무가 마당을 둘러싸고, 저 멀리서는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가 사다 준 전축에 레코드 판을 올려놓고 섬처녀, 흑산도 아가씨, 바다가 육지라면 같은 노래에 흠뻑 빠져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유학하던 친구 오빠가 찾아왔다.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 그가 문득 물었다.
"교회 한 번 나가볼라?"
그 말은 파도처럼 마음속 깊이 밀려들어와 하루 종일 떠나지 않았다. 밤이 되자 아버지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부지, 나 교회 나가봐도 될까잉?"
아버지는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용림아, 이 아부지 어매는 니 오빠 하나 잘 되라고 산에 올라가 두 손 모아 빌고 또 빌며 살아왔는디, 이제 너라도 이웃 동네 교회 다녀불어라잉."
아버지의 뜻밖의 허락에 나는 아버지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나중에야 알았다. 친구 오빠가 나보다 먼저 아버지께 하나님을 소개했던 것이다.
다음 날, 동네에서 교회에 다닌다는 부부를 찾아갔다.
"저도 교회 나가려구요잉. 아부지께 허락 받았당께요."
부부는 눈을 껌벅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 가구가 넘는 동네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그 부부뿐이었으니, 내 말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많은 집들 중에 와서 우리 집에 하나님이 오셨을까잉?
아마 하나님께서 육지에서 버스 타고 오시다가, 신작로에서 제일 가까운 우리 집에 먼저 들르셨나 보다.
처음 교회에 가는 날, 마음이 설렜다. 교회에 들어서니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분이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하나님께 그냥 하고 싶은 말 솔직하게 허면 되제라."
나는 눈을 감고 작은 목소리로 기도했다.
"하나님, 저 첨 나왔어요잉. 우리 아부지 어매 건강 지켜주시고, 우리 언니랑 형부도 건강하게 해 주시오. 그리고 저도 시집갈 때 됐응께, 이왕이면 키 크고 잘생긴 사람 만나게 해주시오잉."
이 기도를 꼬박 1년 동안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정말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살짝 혼란스럽게 하셨다.
처음 소개받았을 때 그는 '양복점 하는 총각'이라고 했다. 그렇게 약혼까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양봉하는 총각'이었다. 벌똥구에서 꿀이 나온다는 말도 처음 들었고, 벌이라고 하면 얼굴이나 팔을 쏘아 울게 만드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런 벌을 기르는 총각이라니.
나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 하나님이 일부러 내 귀를 헷갈리게 하셨구만잉. 그래도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시집가겄습니다잉."
그렇게 내 인생의 한 장이 조용히 넘어갔다. 벌들이 윙윙거리는 소리와 아카시아 꽃 향기는 어느새 내 일상이 되었고, 파도 소리는 여전히 바다 저편에서 들려왔다. 하나님께서 헷갈리게 하신 귀 끝의 장난도, 이제는 따뜻한 미소로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바닷가 집,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들었던 그 노래들, 그리고 처음 하나님께 올렸던 서툰 기도들. 모든 순간이 한 폭의 그림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다. 세월이 흐르고, 그 바닷가 집도, 전축 소리도, 아버지의 따뜻한 눈빛도 모두 멀어졌지만, 여전히 내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잔잔히 파도치는 듯한 여운으로 머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날 우리 집에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은, 사실 늘 내 마음 가장 가까운 곳에 계셨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