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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도는 삶의 길목에서

김왕식








돌고 도는 삶의 길목에서





정용애







주례사가 덕담을 건넸다.
"오늘 신랑 신부 얼굴이 꼭 닮았당께요."
하객들 웃음소리가 예식장을 가득 메웠다.
"밖에 눈이 오는데, 둘이서 같이 맞을랑가? 바람 불어도 흩어지지 말고, 비 오믄 혼자 우산 쓰지 말고, 한평생 꼭 붙어 살겄지라?"
신랑 신부는 나란히 고개 끄덕이며 "예, "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시작된 결혼 생활은 한 해가 흐르는 동안 우리한테 첫 딸, 미소를 안겨줬다.

조그만 집을 마련해서 앞마당 대나무를 뽑아내고 텃밭을 일궜다. 고추랑 참깨 심고, 외양간에는 소 두 마리, 마당에는 바둑이 두 마리 키웠다. 단출했지만, 행복은 넘쳤다.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날, 마당 화단에 활짝 핀 해당화처럼 웃는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했다. 미소는 어느덧 첫돌을 맞았고, 손가락 두 개 펴면서 "뚜뚜두 살" 하는 아이 모습은 동네 자랑이었다. 둘째 딸아이 노래는 무슨 뜻인지 모를 "나노 나노"였지만, 그 순수함에 동네 어르신들 마음까지 녹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뜬금없이 말허드라.
"여보, 양봉 팔아붑시다. 집은 형님 드리고 서울로 가자잉."
시골의 고요함을 떠나 도심의 번잡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남편을 믿고 따랐다. 큰 트럭에 짐이랑 꿀통 실어 서울로 향했다.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은 서울 가까워질수록 멀어져만 갔다.

서울의 밤은 시골이랑 딴판이었다. 가로등 불빛은 대낮처럼 환하고, 끝없이 늘어선 자동차 행렬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남편은 직장 구해 출근 시작했고, 나는 셋째 딸을 품에 안게 됐다. 사람들은 우리를 '세 딸의 집'이라고 불렀다. 서울살이는 점점 버거워졌고, 시골의 평온한 일상이 그리워졌다. 외양간 소 울음소리, 바둑이 짖는 소리, 이웃 미아 아줌마가 양푼에 고구마 옥수수 들고 오던 날들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지친 얼굴로 들어왔다.
"여보, 허리가 너무 아파서 직장 못 나가겄어. 리어카 사서 고물장사라도 해야 겄어 잉."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서울은 생각보다 차갑고, 삶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남편 대신 나도 일하러 나가야 했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어느덧 2년이 흘렀다. 남편은 일하다 머리 다쳐 돌아왔고,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졌다. 밤이면 고향 별빛을 떠올리며 눈물 삼켰다. 그때, 앞집 경자 엄마가 다급히 찾아왔다.
"미소 엄마, 니 이러고 사는 거 보믄 내 가슴이 찢어진다잉. 저 위에 용한 점쟁이가 왔다고 하니께, 얼른 나랑 가보자."
억지로 끌려간 점쟁이 집은 무섭기만 했다. 근데 점쟁이가 내게 말했다.
"얘기 엄마, 당장 여기서 나가. 나가면서 뒤돌아보지 말고, 근처에 문 열어놓은 교회 있으면 들어가서 '나 이제 왔습니다'만 하고 나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발걸음은 자연스레 교회로 향했다. 구로에 있는 조그만 교회, 문 열고 들어가 조용히 말했다.
"나 이제 왔습니다."
그 한마디가 삶을 바꿔놨다.

딸들과 함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주일학교에 딸들 데리러 갔다가 만난 이는 고향 이웃, 정림이 언니였다.
"어메, 니 용림이 아니여? 나 정림이 언니여!"
세상에, 이렇게 넓은 서울에서 고향 사람을 만날 줄이야.
"땅은 넓고도 좁네잉, 언니를 다 만나다니!"
고향의 추억과 함께 다시 찾은 교회는 마음의 안식처가 됐다. 찬송가 부르며 눈물 흘렸고, 마음에는 다시 평안이 찾아왔다.

그 후 7년 동안 이사를 일곱 번이나 했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서울의 차가운 불빛 속에서도, 고향의 따뜻한 햇살을 마음에 품고 살아갔다.

삶은 끝없이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때론 길을 잃어도 결국 돌아올 곳은 하나님의 품이었다. 고단했던 날들은 믿음으로 이겨낸 시간이었고, 고향의 별빛은 이제 마음속에서 영원히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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