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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겨울, 그 따뜻한 기억

김왕식








서울의 겨울, 그 따뜻한 기억





이종식




서울의 겨울은 유난히도 길고, 매서웠다. 바람은 골목길을 휘돌아 차가운 숨결로 집 안까지 스며들었고, 문틈 사이로 날카로운 칼바람이 파고들 때면 몸을 잔뜩 웅크리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아랫목의 따뜻함은 더 간절했다. 외출하셨던 아버지가 돌아오면, 아랫목 한켠엔 따끈한 밥그릇 몇 개가 가지런히 놓였다. 밥 짓는 냄새에 배고픔은 더해졌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한 이불을 덮으면 아랫목의 따뜻한 자리를 차지하려 발끝 싸움이 벌어졌다. 서로 발을 깊이 넣으려다 머리가 부딪히고, 엉켜버린 이불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순간들은 사소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긴긴 겨울밤, 어린 마음속 불평은 자주 피어났다. ‘엄마는 왜 찹쌀떡 하나, 메밀묵 하나도 안 사주나.’ 속으로만 중얼거리던 그 시절,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배고픔은 이불속에서도 따라붙었고, 몸을 돌릴 때마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칼바람이 볼을 스쳤다. 아무리 껴입어도 추위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벽에 붙여놓은 껌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그 껌 하나조차 아까워 다음 날 또 씹으려고 애썼다. 그 작은 껌 한 조각이 주는 달콤함마저도 그 시절엔 귀한 즐거움이었다.

밤이 깊어 화장실에 가려고 이불을 걷어내면, 찬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옷은 곰처럼 껴입었지만, 발끝까지 스며드는 추위는 피할 수 없었다. 동네 공동 화장실에 가면 신문지를 들고 줄 서 있는 이웃들의 모습이 익숙했다. 1열, 2열로 나란히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 얼굴엔 추위를 참느라 굳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 안에서도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말 한마디, 웃음 한 줄기가 오가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 작은 교감이 추운 밤의 공기를 조금은 덜 차갑게 만들었다.

겨울이면 밭에서 배추를 뽑아간 자리를 아이들과 함께 뒤지곤 했다. 땅속 깊이 박혀 있는 배추 뿌리를 캐내는 일은 마치 보물찾기 같았다. 배추 뿌리는 특별한 맛이 있었다. 흙냄새가 배인 그 뿌리를 씹으며 추운 날씨 속에서도 아이들은 웃음꽃을 피웠다. 소박한 기쁨이었지만, 그때는 세상 어떤 잔치보다도 더 즐거운 순간이었다.

소독차가 동네 골목을 누비고 다닐 때면, 아이들은 그 뒤를 따라다녔다. 뿌연 연기가 얼굴을 덮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연기 속을 헤집으며 달리는 것이 놀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고 위험한 짓이었지만, 그때는 그저 재미있었다. 가끔 친구들끼리 웃으며 말하곤 했다. "머리가 나쁜 게 혹시 그 소독차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 시절의 그런 유치한 추억들마저도 지금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엔 모든 게 맛있었다. 배고팠기에 더 맛있었고, 추웠기에 더 따뜻했다. 가난했지만 마음은 풍요로웠고, 부족했지만 이웃과 나누는 온기가 있었다. 물질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서로를 향한 따뜻한 배려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겨울밤 이불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나눴던 따뜻한 온기, 공동 화장실 앞에서 이웃들과 나눈 소소한 대화, 그리고 배추 뿌리 하나에 웃음을 터뜨리던 그 시절의 순수한 마음은 지금도 가슴 한켠에서 따뜻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서울의 겨울은 여전히 차갑고 길겠지만,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은 마음속에서 늘 따뜻하게 빛난다. 바람이 불고 추위가 스며들 때면, 아랫목의 따스함과 가족의 웃음소리가 떠오른다. 부족함 속에서도 함께였기에 가능했던 그 따뜻한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비록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변했지만, 어린 시절 서울의 겨울은 여전히 가슴속에 따뜻한 온기로 남아, 삶의 한켠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이종식 작가의 글은 회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에는 삶의 본질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이 스며들어 있다. 가난과 추위, 결핍 속에서도 빛나는 인간미와 따뜻함을 놓치지 않는 그의 시선은 삶을 바라보는 긍정적이고 소박한 태도를 반영한다.
이는 작가의 가치철학이 물질적 풍요보다 인간관계와 정서적 유대에 더 큰 가치를 둔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가족과 이웃, 그리고 함께 나눈 일상의 따뜻한 순간들은 인간이 본래 추구하는 근본적인 행복의 형태를 드러낸다. 작가는 부족함 속에서도 나눔과 공동체의 소중함을 강조하며, 이는 현대 사회의 각박함과 대조되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일깨운다. 그가 묘사하는 아랫목의 따뜻함이나 공동 화장실 앞에서의 소소한 교류는 과거의 기억만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따뜻한 연결을 상징한다.

작가의 미의식은 이러한 일상적 소재들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데 있다. 특별하거나 화려한 장치 없이도 그는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벽에 붙여 놓은 껌 한 조각, 배추 뿌리를 캐던 순간, 소독차 뒤를 쫓던 기억까지도 그의 글 안에서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그 속에 담긴 감정의 결은 세월을 넘어 독자에게 따뜻하게 전달된다.

또한, 작가의 유머 감각과 자기반성적 태도는 그의 글에 인간적인 매력을 더한다. ‘머리가 나빠진 게 소독차 때문일까’라는 농담 섞인 표현은 과거의 어려움을 단순히 미화하지 않고, 그 시절의 고난조차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여유와 지혜를 보여준다. 이는 그의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현실을 받아들이는 관조적 시선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결국, 작가는 글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적 가치—나눔, 사랑, 그리고 함께하는 삶—을 탐구하며, 일상의 소박함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미의식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과거의 따뜻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현재의 삶에서도 그러한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작가의 글은 회고담을 넘어, 우리 모두가 잊고 지냈던 삶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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