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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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裸木은
시인 백영호
매화는 찬서리 칼바람
맨몸으로 이겨내
하이얀 꽃망울 터트리지만
그 맑음 함부로 팔지 않고
향나무는 자기를 찍어 낸
도끼든 자 앞에서도
제 몸의 향기 뿜어냈다
배롱나무는 꽃이 귀한
여름 한철 내내
화려하게 꽃을 피워 올려
폭염에 지친 길손들
마음을 잡았으며
대나무는 일 년 만에
장대키로 자라서
꽉 찬 속 텅텅
비우고 털어 냈지만
꺾이거나 휘지 않고
절개의 상징나무 됐다 는
인류보다 오래전에 있어
내 삶보다 오래 살았고
참 많은 식구들 거느리고도
내 어머니처럼 살아온 겨울 나목,
삼백예순 날
내 경배의 대상으로 정좌한다.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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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호 작가는 시인 훨씬 이전에
조경학자이다.
백 시인은 자연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나목裸木은 예사사람들이 살피지 못하는 매의 눈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제시된 나목,
즉 매화는 봄, 향나무는 여름, 배롱나무는 가을, 대나무는 겨울의 사시四時를 상징한다.
하여 시 '나목裸木은'은 자연 속 나무들이 지닌 속성과 그것이 인간 삶에 투영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시인은 평생 조경학을 전공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이력답게, 나무를 삶의 철학적 상징으로 다루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이해와 경외심이 그저 감사만이 아니라, 실천적 태도로 승화된 점에서 그의 작품은 독특한 미의식을 지닌다.
이 시에서 매화, 향나무, 배롱나무, 대나무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
매화는 매서운 추위를 견디고 꽃을 피우지만, 그 맑음을 함부로 팔지 않는다. 이는 인간이 견뎌야 하는 삶의 시련과 이를 초연히 감내하는 태도를 상징한다. 향나무는 스스로를 찍어내는 도끼 앞에서도 향을 잃지 않는다. 이는 원한과 분노가 아니라, 자신을 그대로 내보이는 삶의 태도를 뜻한다. 배롱나무는 한여름 폭염 속에서도 화려한 꽃을 피우며 지나가는 이들에게 위로가 된다. 이는 인간이 남을 돕고 보듬는 역할을 맡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대나무는 빠르게 성장하지만, 속을 비움으로써 오히려 꺾이지 않는 절개의 상징이 된다. 이는 자기 비움을 통해 강인함을 유지하는 철학적 가치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다양한 나무의 특성을 설명한 후, 시인은 ‘겨울 나목裸木’을 특별히 부각한다. 인류보다 오래된 나무는 인간의 삶보다 더 길게 살아가며 수많은 생명을 거느리면서도, 어머니처럼 품어준다.
시인의 시선에서 나목裸木은 겨울의 삭막한 풍경이 아니라, 삼백예순 날 경배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숭고한 존재다. 나무의 존재 방식 자체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인간 삶과 연결시키는 점에서 백영호 시인의 미의식은 철저히 자연 중심적이며,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백영호 시인의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하지만, 자연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철학적 사유와 인간의 가치관을 내포하는 상징적 구조를 띤다. 그는 나무를 통해 인간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하며, 그것이 그저 감상이 아니라 실천적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이는 조경학자로서 자연과 함께 살아온 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시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자연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게 만드는 그의 시 세계는, 독자에게 감동을 넘어 실천적 깨달음을 제공하는 힘을 지닌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