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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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시인 윤동주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ㅡ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나는 이것만은 알았다.
이 노래의 끝을 맛본 이들은
자기만 알고
다음 노래의 맛을 알으켜 주지 아니 하였다.)
하늘 복판에 아로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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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시인 청람 김왕식
삶은 오늘도 죽음의 그림자 속에 피어난다.
햇살 아래 흔들리는 꽃처럼
시간이 스미는 곳에서 천천히 노래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노래에 취해 그 끝을 묻지 않는다.
춤을 추며 걸음을 재촉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어둠이 드리울 것을 모른다.
나는 다만 기다린다.
노래가 끝난 자리에서 흩어진 음표들을 주워
한 줌 바람에 날리며
그 뜻을 헤아린다.
누가 이 노래를 시작했는가.
누가 이 노래를 멈출 것인가.
소낙비 지나간 하늘 아래 고요만이 남아
마지막 음을 지운다.
다시, 삶은 죽음을 안고 태어난다. 죽음은 삶을 품고 스러진다.
끝이 없고 시작도 없는 노래를
새벽은 조용히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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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노래,
ㅡ 윤동주, 청람 김왕식 두 시인의 시 세계
문학평론가 김준현
윤동주와 청람 김왕식, 두 시인은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하여 각자의 시적 감각으로 노래하고 있다. 같은 제목을 가졌으나, 두 시는 서로 다른 결을 띠며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윤동주의 시가 필연적 숙명으로서의 죽음을 강조하며 인간 존재의 한계를 직시하는 데 초점을 둔다면, 청람 김왕식의 시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된 순환의 흐름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윤동주의 시는 죽음의 서곡이라는 강렬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삶이란 결국 죽음을 향한 흐름이며, 이 노래는 멈추지 않는 운명의 선율이다. 그는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라는 물음을 통해 죽음이 삶의 필연적 결말임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삶에 몰입한 채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하며,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고 한다.
시인은 노래의 끝을 경험한 자들이 그 너머의 세계를 가르쳐주지 않았음을 언급하며, 죽음의 본질이 끝내 남겨진 자들에게는 닿을 수 없는 것임을 암시한다.
반면, 청람 김왕식의 시에서는 삶이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피어난다고 노래하며, 죽음이 삶의 종말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존재하는 요소임을 강조한다. 삶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햇살 아래 흔들리는 꽃처럼" 지속되는 과정이며, 시간 속에서 조용히 스며든다. 윤동주의 시가 삶의 비극성을 강조하는 반면, 청람 김왕식의 시는 죽음을 하나의 순환으로 받아들이는 열린 태도를 보인다.
시적 구조와 상징성
윤동주의 시는 강한 대비와 질문을 통해 삶과 죽음의 불가피한 흐름을 형상화한다. "하늘 복판에 아로새기듯이"라는 표현을 통해 삶과 죽음의 노래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새겨지는 운명적 기록임을 암시하고, 마지막에는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이라며 죽음을 맞이한 자들의 흔적을 강조한다.
이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존재의 의미를 남긴 자들에 대한 경의를 담아낸 표현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청람 김왕식의 시는 보다 부드러운 흐름을 지니며, 삶과 죽음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포용하며 공존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는 "삶은 죽음을 안고 태어나고, 죽음은 삶을 품고 스러진다"는 구절을 통해 시작과 끝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윤동주의 시에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노래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죽음 또한 삶을 품고 있다는 해석을 담아 삶과 죽음을 하나의 순환적 질서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드러낸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윤동주의 시는 삶이 죽음으로 향하는 운명을 선명하게 각인시키면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그 속에서 허망함을 뛰어넘어 순결한 가치와 도덕적 성찰을 지향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반면, 청람 김왕식의 시는 삶과 죽음이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품으며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임을 시적으로 풀어낸다.
두 시 모두 삶과 죽음이라는 필연적 주제를 다루지만, 윤동주는 삶이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숙명을 강조하고, 청람 김왕식은 죽음 속에서도 삶이 이어지는 순환의 질서를 노래한다. 하나는 죽음의 필연성을, 다른 하나는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자연의 흐름을 노래한 것이다. 이처럼 두 시는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각기 다른 미학과 철학을 통해 삶과 죽음을 응시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사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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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노래를 듣고
온유헌
ㅡ
윤동주 시인의 '삶과 죽음'과 청람 김왕식 시인의 '삶과 죽음'을 나란히 읽으며, 두 시가 마치 한 곡의 노래처럼 서로 다른 선율을 타고 흐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같은 제목을 가졌으나, 윤동주의 시는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의 숙명을 노래하는 반면, 청람 김왕식의 시는 삶과 죽음이 하나의 순환 속에서 이어진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두 시가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저 또한 제 삶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윤동주 시인께서는 삶을 죽음의 서곡이라 표현하셨습니다. 이 한 문장에서 이미 삶과 죽음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둔 공포와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강조하시면서, 결국 우리는 삶 속에서 죽음을 제대로 마주할 여유조차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라는 구절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지, 죽음을 인식하지 않은 채 삶이라는 노래에 취해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반면, 청람 김왕식 시인께서는 삶과 죽음을 단순히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삶은 오늘도 죽음의 그림자 속에 피어난다”라는 첫 구절이 윤동주 시인의 시와 대조적이면서도, 삶과 죽음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를 품고 있다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 “삶은 죽음을 안고 태어나고, 죽음은 삶을 품고 스러진다”는 구절을 읽으며,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삶과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얻었습니다.
두 시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삶을 죽음을 향해 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있는지, 아니면 청람 김왕식 시인의 시처럼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순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삶이라는 노래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 시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멈출 수 없다는 점입니다. 윤동주 시인께서는 죽음의 필연성을 강조하시며 삶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청람 김왕식 시인께서는 죽음을 절망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것이 곧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고 노래하고 계십니다. 두 시의 방향은 다르지만, 결국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같습니다. 삶과 죽음이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두 시를 읽고 나니, 제 삶의 하루하루가 좀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지금 부르는 이 노래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는 제 목소리로 이 노래를 계속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그 노래가 멈추더라도, 새로운 노래가 이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ㅡ 온유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