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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가 울지 않는 봄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Mar 05. 2025










                      개구리가 울지 않는 봄



                                      김왕식





개울가의 얼음이 풀리고 촉촉한 바람이 분다. 햇살이 따스하게 스며들며 대지는 비로소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자연의 시계는 정확하다. 경칩이 되면 개구리는 땅속에서 나와 몸을 펴고, 기다렸다는 듯이 울음을 터뜨린다. 개울가와 논둑은 한순간에 생명의 합창으로 가득 찬다. 맑은 물속에서 개구리는 앞다투어 몸을 던지고, 풀숲 사이에서 튀어 오르며 봄이 왔음을 알린다. 풀잎은 찰랑이고, 흙에서는 생명의 기운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봄마다 반복되는 이 장면은 자연이 보여주는 가장 생명력 넘치는 풍경 중 하나다.

이제 이 모습은 기억 속 한 조각이 되었다.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어릴 적엔 논둑을 걷다 보면 어디서든 들을 수 있던 요란한 합창이 이젠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개구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사라진 개구리를 따라 논둑을 걸어본다. 한때 촉촉했던 논은 말라버렸고, 개울이 흐르던 자리엔 시멘트가 덮였다. 논둑의 풀들은 베여 나가고, 습지는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졌다. 물길은 인위적으로 조정되었고, 개구리가 머물던 작은 웅덩이들은 공사장 흙더미 속으로 묻혔다. 사람들은 개구리 대신 편리한 길을 얻었고, 시멘트로 다져진 도랑을 통해 빗물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얻은 편리함은 무엇을 남겼을까? 개구리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고요함이 아니라 황량함이다. 개울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고, 논둑은 생명을 품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연을 조정하며 더 나은 환경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자연이 사라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개구리가 사라진 풍경은 곧 사람들의 삶과 닮아 있다. 개구리의 울음이 사라지듯, 사람들의 웃음도 사라지고 있다. 논이 말라버리듯 서민들의 삶도 메말라 간다. 도시의 확장은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었지만, 그 편리함 속에서 잃어버린 것은 더 컸다. 예전에는 논두렁을 따라 개울을 건너던 아이들이 있었고, 풀숲에서 메뚜기를 잡으며 뛰놀았다. 개구리울음소리를 듣던 기억은 아이들에게 작은 자연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은 아스팔트 위에서 뛰어놀고, 스마트폰 속 화면에서 자연을 배운다. 개구리가 울지 않는 봄은,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봄이 사라지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환경이 변하면서 자연이 사라진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의 인식도 변했다. 개구리 한 마리가 사라진다고 세상이 달라질 리 없다고 생각한다. 작은 웅덩이가 사라지고 논이 개발된다고 해서 큰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나 작은 변화들이 쌓여 결국 우리의 삶 자체가 변해가고 있다. 생명을 품던 땅이 콘크리트로 덮이듯, 우리 마음속 여유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개구리는 어디로 갔는가? 개구리가 떠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리고 이 조용한 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느 봄날, 논둑을 걷던 사람이 문득 이 모든 것을 깨닫고 개구리의 울음이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개구리가 돌아오기엔,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아직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개구리가 다시 울 수 있도록 작은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 논에 물을 대고, 개울에 흐르는 물길을 살피며, 자연이 숨 쉴 공간을 되찾아 주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자연의 모습을 되새기는 것. 그렇게 다시 봄을 맞이할 수 있다면,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다시 들릴지도 모른다.

봄은 왔지만, 개구리는 울지 않는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개구리가 다시 울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것이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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