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하로동선(夏爐冬扇)
ㅡ부질없는 것을 품은 마음에 대하여
여름날의 화로는 불씨를 가두고, 겨울밤의 부채는 찬바람을 부른다. 하로동선, 세상의 뜻을 거스르는 물건들이 한켠에 쓸쓸히 놓여 있다. 바람이 오지 않는 나뭇가지처럼, 어깨에 내리는 눈송이를 피하지 않는 낡은 외투처럼, 그것들은 누구의 손길도 받지 못한 채 시간 속을 허무하게 건너간다.
사람의 마음도 때로는 이 하로동선을 닮는다. 이미 지고 있는 꽃을 붙들고, 떠난 사람의 발자국에 귀를 기울이며, 끝난 계절을 붙잡아 온기를 얻으려 한다. 그러한 마음은 사막에 비를 구걸하는 일이고, 빈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는 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그런 부질없는 갈망 속에서 가장 깊은 자신을 마주한다.
하로동선은 결코 무가치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름의 화로가 쓸모없어도, 그 불빛 아래서 이야기는 태어나고, 겨울의 부채가 쓸모없어도, 그 흔드는 손목에는 기다림의 떨림이 깃든다. 쓰이지 않는 도구들은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다만 제 자리에 조용히 서서, 시간이 흐르기를, 누군가 필요한 순간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니 하로동선은 인생의 뒷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시절을 잘못 만난 재능, 때를 알지 못한 사랑, 맞지 않는 자리에서 피어난 신념들. 그것들은 버려져야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이 저문 후에 비로소 이해받는 것들이다. 불필요함을 견디는 동안, 마음은 더욱 단단해지고, 쓸쓸함은 언젠가 빛나는 자국이 된다.
꽃이 피지 않는 겨울에도 뿌리는 자란다. 부채가 부채질할 바람이 없을 때에도, 사람은 여전히 숨을 쉬고, 꿈을 꾼다. 하로동선은 그런 존재의 숙명을 말한다. 부질없음을 품고, 무심하게 살아가는 것, 그러나 그 안에서 자신조차 모르는 생명의 숨결이 피어오르는 것.
결국, 여름 화로도 겨울 부채도 언젠가 누군가의 손길을 만난다. 모든 것은 제 시간이 오기까지 조용히 숨을 고를 뿐이다. 하로동선이란, 시간 너머를 견디는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 시
하로동선(夏爐冬扇)
여름 한복판,
불씨를 품은 화로 하나
잊힌 듯 숨을 죽인다.
겨울 끝자락,
찬바람을 향해 흔드는
가벼운 부채 하나
허공만 휘젓는다.
꽃이 진 가지를 붙드는 손처럼,
지나간 발자국을 귀 기울이는 마음처럼,
무릇 모든 부질없음은
가장 깊은 사랑의 다른 이름.
필요 없는 것들은
아무 말도 없이 견딘다.
뜨거운 여름날에도 화로는 붉고,
차가운 겨울밤에도 부채는 춤춘다.
서둘러 버리지 말라,
철 지난 것들의 고요한 품을.
어쩌면 가장 늦은 계절에
가장 필요한 불빛이 되고
가장 절실한 바람이 될 테니.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다.
제 철을 모른 채 피어난 꿈도
제 길을 몰라 흔들리는 믿음도
다 지나고 나면
한 겹 깊어진 생의 무늬가 된다.
여름 화로여, 겨울 부채여,
너희를 품은 이의 외로움마저도
언젠가
꽃이 된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