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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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 봄
소리의 초록, 숨의 교향
개울가 어귀, 첫울음이 퍼졌다.
짙은 물기 머금은 저녁 공기 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목청을 열었다.
그 울음은 봄의 그늘 아래서 긴 시간을 기다린 존재가 처음 세상에 건네는 인사 같았다.
땅은 그 소리에 깊이 응답했다.
맹꽁이, 그 어두운 흙빛 생명은 한 템포 늦게 답하며
묵직한 저음으로 저녁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땅의 가장 깊은 숨결이자,
시간의 심연에서 솟아나는 첫 문장.
하늘 언저리 전깃줄 위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구구구’ 추임새를 얹는다.
그 소리는 화음을 맞추려는 손짓이자,
질서 없는 듯 조화로운 이 자연의 오케스트라에 덧입히는 리듬의 망사다.
고요한 울림으로,
공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숨을 쉬는 모든 것의 이름을 천천히 불러준다.
청보리밭은 무성해지고 있었다.
날이 차츰 길어지는 초록의 계절,
그 틈을 가르며 종달새 한 마리가 치솟는다.
가벼운 날갯짓이 곧 음표가 되고,
울음은 하늘 깊숙한 곳에 실로 꿰듯 이어진다.
푸른 빛결을 타고 올라가는 그 소리는
이 세상이 아직 아름답다고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 같고,
바람에게 맡겨진 순결한 고백 같다.
청보리들은 그 아래서 물결치며 박수를 보낸다.
흔들림이 아닌, 합주의 몸짓으로.
개구리의 첫울음,
맹꽁이의 단단한 응답,
비둘기의 추임새,
종달새의 날 선 노래.
모두가 어느 날도 같지 않은 음의 계단으로,
서로의 존재를 부르고, 채우고, 이어간다.
이곳에는 지휘자가 없다.
악보도 없다.
그러나 놀랍도록 정확한 순서와 겹침이 있다.
소리는 빛을 대신하고,
울음은 색이 된다.
모든 울음에는 근원이 있고,
모든 대답에는 방향이 있다.
그리하여 하나의 몸처럼 자연은 숨을 쉰다.
들숨에는 초록이, 날숨에는 생명이 묻어난다.
이 음악은 멈추지 않는다.
자연이 살아 있는 한,
숨을 쉬는 모든 것이 귀 기울이는 한,
이 교향은 반복이 아니라 진화다.
소리는 잎을 흔들고,
물살을 깨우고,
돌 틈의 이끼까지 반응하게 한다.
이 울림 속에는 비밀이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새롭다.
개구리의 울음은 겨울을 이긴 노래,
맹꽁이의 응답은 뿌리의 언어,
비둘기의 추임새는 침묵의 리듬,
종달새의 절창은 빛으로 피어나는 날개다.
이 교향은 단지 자연의 음악이 아니다.
그 안에는 순환의 윤리가 있고,
공존의 철학이 있으며,
지극히 단순하고도 치열한 생명의 서사가 숨어 있다.
언제나처럼 이 연주는 무대 없이 펼쳐지고,
박수도, 종소리도 없이
하루가 저문다.
■ 여름
빛의 굉음
뜨겁게 달아오른 오후,
들판 가장자리에서 첫 굉음이 울려 퍼진다.
매미.
빛보다 빠르게 진동하는 몸으로
매미는 여름을 시작한다.
그 울음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몸을 찢고 나와 세상에 내놓는 절창,
사랑을 부르고, 생을 다하여 남기는
투명한 함성이다.
장대비가 덮쳐온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짧은 음절로 두드리는 건반 같다.
비는 대지 전체를 하나의 북판으로 바꾸고,
논두렁을 치며 울리는 리듬은
태양이 내뿜은 뜨거운 숨결을 식히는
냉정하고도 정확한 박자다.
구름은 점점 두꺼워지고,
멀리서 천둥이 몸을 말아 번개로 튕긴다.
그 하얀 섬광은 하늘을 잠시 열었다 닫고,
소리 없는 빛이 세상을 문질러
잊고 있던 감각을 되살린다.
잠시 후,
굉음이 뒤따라온다.
땅의 척추를 흔드는 소리.
하늘이 내려앉는 소리.
그러나 그 안에도 질서가 있다.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나누어주는 것이다.
소리와 침묵,
뜨거움과 냉기,
속도와 여백.
들판의 벼 이삭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잎사귀는 빗방울을 등에 받고,
한꺼번에 고개를 떨군다.
이것은 항복이 아니라, 환대.
비를 맞는 것이 아니라
빛과 열을 품은 물의 세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벼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악기,
그 몸짓 하나하나가 자연의 운율이다.
언덕 위에서는 들깨꽃이 무리를 지어
바람을 부른다.
그 꽃은 향기로 노래하고,
벌과 나비는 낮게 웅웅거리며
그 노래의 숨을 따라 춤춘다.
초록은 더 이상 색이 아니다.
온몸으로 움직이는
빛의 생리학이다.
여름은 절정이다.
모든 소리가 살아 있고,
모든 생명이 말하고 있다.
그 말은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오직 몸과 빛,
온도와 진동으로만 느껴지는
생의 선율이다.
여름의 교향은
봄보다 뜨겁고,
가을보다 현란하며,
겨울보다 격렬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계절마다 바뀌는 단 하나의 주제가 있다.
살아 있으라는 것.
제 소리로,
제 숨결로,
제 자리에
온전히 서 있으라는 것.
굉음은 울리고,
한낮의 햇살은 모든 것을 노출시킨다.
그러나 그 뜨거움 속에서도
생명은 피어나고,
침묵은 자라고,
자연은 자신을 스스로 지휘한다.
이것이 여름의 방식이다.
강렬하지만 조율된,
혼돈처럼 보이지만 질서 위에 선
빛의 교향.
■ 가을
잎의 문장
어느새 바람이 바뀌었다.
잎사귀 끝에서 들리는 소리가
설렘이 아니라 결별의 언어로 바뀌었다.
가을이다.
이 계절은 말이 적다.
소리는 줄어들고, 대신 표정이 많아진다.
빛은 길어지고, 그림자는 길게 숙인다.
자연은 말 대신 몸으로 쓰는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의 서두는
‘낙엽’이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첫 번째 낙엽이 진다.
나무는 소리 없이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내려놓음은 이 계절의 문법이다.
잎 하나하나가 문장이고,
떨어지는 동작마다 쉼표가 된다.
어떤 잎은 점이고,
어떤 잎은 물결표.
가을은 침묵 속에 쓰이는 문장들의 계절이다.
벼 이삭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고개를 숙였다.
그 숙임은 겸손이 아니라 완성이다.
한 계절 동안 받은 햇살과 바람,
비와 번개의 기억이
이삭 안에 촘촘히 저장되었다.
이삭은 생명을 담은 문장이다.
잘 여문 단어들이
소리 없이 들판 위를 누른다.
무게로 말하는 시간이다.
들길을 걷는 바람은
이제 매미가 아닌 귀뚜라미를 깨운다.
귀뚜라미는 시인이 되었다.
적막 속에서 짧은 시를 토해내고,
그 울음은 수묵화처럼 번진다.
기억의 골짜기를 돌아나가는 가락,
지나간 여름을 가슴에 눌러 담은 듯
애틋하고, 정제되어 있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멀다.
햇살은 사선으로 기울고,
시간은 하루가 아니라 순간으로 움직인다.
모든 것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변한다.
나무도, 들도, 짐승들도
속삭임으로만 존재를 드러낸다.
큰 목소리는 사라졌고,
가을은 오직 잔잔함과 흔들림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이 계절은 돌아봄의 계절이다.
삶이 어떤 여름을 지나왔는지,
얼마만큼을 견뎠는지,
어떤 바람을 품었는지,
조용히 묻고 조용히 듣는다.
대답은 말이 아니라 낙엽이다.
떨어지며 써 내려가는
자연의 자서전.
가을은 생명의 가장 조용한 외침이다.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내어주는 시간.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날 것을 믿고
천천히 비워가는 지혜.
잎은 진다.
그러나 그 떨어짐이 곧
다음 계절의 씨앗이 된다.
그래서 이 계절은 슬프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가을은 오히려 가장 다정한 계절이다.
말없이, 천천히,
그리움과 함께 걷는 시간.
■ 겨울
침묵의 악보
새벽 공기가 유리처럼 맑고 차다.
숨을 들이마시면 이마 뒤편까지 서늘해지고,
내쉬는 숨결은 흰 김으로 변해
공중에 짧은 문장을 남긴다.
겨울이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하지만
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모든 소리가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 있을 뿐이다.
바람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대신 한 음절의 침묵으로 모든 것을 감싼다.
산은 웅크리고,
들판은 입을 다물고,
강물조차 천천히 자신의 흐름을 접는다.
이 계절은 침묵으로 악보를 그린다.
눈발은 그 음표다.
첫눈이 내리는 날,
하늘은 지극히 조심스럽다.
소리 하나 내지 않고
하얀 점들을 땅 위에 수놓는다.
그 점들이 쌓여
어떤 날은 평화가 되고,
어떤 날은 슬픔이 된다.
눈은 무채색의 언어로 세상을 덮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수천 갈래다.
겨울나무는 벌거숭이가 되었다.
잎을 벗고, 색을 빼고,
자신의 뼈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나 그 드러냄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용기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도 꺾이지 않는 것,
그것이 겨울나무의 품격이다.
가장 덜어낸 것이
가장 단단해진다.
새들은 멀리 날아가고,
남은 몇 마리는 담장 밑 볕 든 자리에서
짧은 숨을 고른다.
울음도 조심스럽고,
움직임도 아껴둔다.
추위는 모든 것을 숨죽이게 만들지만
그 속에 있는 생명은 더욱 뜨겁다.
겨울은 얼음 안에 피어나는 작은 심장이다.
장작불이 타오른다.
그 불은 여름의 나뭇가지들이 남긴 마지막 말.
따뜻함은 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불을 기다린 시간에서 온다.
겨울은 기다림의 계절이다.
어떤 생명도 서두르지 않고,
어떤 나뭇잎도 제철을 앞당기지 않는다.
모든 존재가 ‘다시 오는 봄’을 믿고
한 음씩, 느리게 호흡한다.
그리하여 겨울은
가장 깊은 내면이 드러나는 계절이다.
침묵은 언어가 되고,
멈춤은 또 다른 움직임이 된다.
이 계절의 악보는 들리지 않지만,
그 여백 속에는
살아내야 할 삶의 리듬이 정갈히 그려져 있다.
이것이 겨울의 노래다.
얼어붙은 것들 속에서
여전히 움직이는 생명의 증명.
가장 조용한, 그러나 가장 강한
침묵의 교향곡.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