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람의 사계 2

김왕식






사계




숨으로 연주되는 세계

















프롤로그



세상에는 들리는 음악이 있고,
들리지 않지만 살아 있는 음악이 있다.
이 글은 후자의 세계를 듣고, 그 감각을 기록한 사계절의 연작이다.
비가 흐르면 바람이 움직이고,
바람이 흔들리면 풀잎이 노래하며,
때로는 침묵조차 하나의 선율이 된다.
자연은 매 순간, 자신을 음악으로 환원한다.
색보다 먼저 울림이 있고,
움직임보다 먼저 진동이 있으며,
그 진동 위에서 삶은 조용히 숨을 쉰다.

이 글은 그런 세계를 향해 귀를 기울인 결과다.
사람의 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풀꽃과 나무, 매미와 눈송이, 낙엽과 얼음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외를 담았다.

들리지 않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면,
자연은 다시 언어가 되고,
그 언어는 곧 삶을 위한 조용한 악보가 된다.
이 사계절의 기록이
누군가의 고요한 내면과 겹쳐져
또 하나의 울림이 되길 바란다.














봄비가 흐를 때, 생명은 연주된다






봄비가 내리는 아침이다.
소란하지 않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 빗소리는
마치 오래된 악보 위에 적힌
조용한 서주(序奏)처럼 흐른다.
지붕 위로, 가지 위로, 땅 위로
물의 음표들이 하나하나 박혀간다.
그 물결은 소리가 아니라 숨결이고,
빛이 아니라 감촉이다.
세상이 조용히 젖어가며,
하나의 교향이 시작된다.

봄비가 첼로의 음처럼 낮고 부드럽게 깔리면
봄바람이 곧 뒤따라온다.
나붓나붓, 숨결처럼 얇고 따뜻한 바람은
지휘자의 손끝처럼 공간을 흔든다.
풀들은 그 손짓을 따라 고개를 흔들고,
꽃들은 미세한 떨림으로 화답한다.
잎맥 사이로 스미는 바람은
현악기의 활처럼 줄기를 스쳐가며
자연의 숨을 켜기 시작한다.

나무는 제 몸을 비워
빈 울림통이 되고,
그 빈 곳마다 바람은 스며들어
낮은 울림을 낸다.
꽃잎 하나도 그 울림에 귀 기울이고,
잎사귀마다 서로의 리듬을 기억한다.
이따금 나뭇가지 위의 작은 새가
가만히 날개를 펼치며 몸을 턴다.
그 깃털 사이에도 바람은 살짝 머물다 가며,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속삭인다.

이 모든 움직임은
연습된 것이 없다.
하나도 짜여 있지 않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는다.
비는 시작이고, 바람은 전개이고,
풀과 꽃과 나무와 새들은
각자의 악기를 꺼내든 연주자다.
그리고 그 연주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묵묵히 울려 퍼진다.

봄비는 물이 아니다.
기억이다.
겨울 내내 침묵하던 것들이
그 물을 통해 깨어난다.
돌 틈의 이끼도,
잊힌 씨앗도,
굳어 있던 마음도
그 촉촉한 선율을 타고 다시 살아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존재가 그 빗속에서
제 목소리를 되찾는다.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비가 멎어도
그는 여전히 들판을 돌고,
가지 사이를 흔들며
숨겨진 음을 찾아낸다.
그 음은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풀과 꽃과 나무, 그리고 새들은
그 소리를 안다.
그 소리에 따라 숨 쉬고,
고개를 들고, 몸을 비튼다.

이것이 봄이다.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피어나는 계절.
색보다 먼저 울림이 스며드는 시간.
비가 흐르면
세상은 물빛 선율로 적시고,
바람이 춤추면
그 춤은 곧 생명의 탄주가 된다.

봄의 연주는
언제나 비에서 시작되고,
바람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세상은,
소리 없이 살아난다.





여름




빛이 불타고 매미가 울 때


해는 높고, 바람은 짧아진다.
여름은 어떤 날은 빛으로 시작되고,
어떤 날은 소리로 깨어난다.
아침부터 내리 꽂히는 햇빛은
타악기처럼 땅을 두드리고,
그 반사된 열기가 대지 위를 타오르게 한다.
여름은 불의 계절이다.
모든 것이 익고, 터지고, 울부짖는다.

매미가 운다.
단숨에, 격렬하게.
온몸의 진동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세상에 내던진다.
그 울음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각 매미의 울음은 음역이 다르고, 진동이 다르며,
시간과 공간을 꽉 채운다.
매미는 대지의 바이올린이다.
하늘 가까운 나뭇가지에 매달려
여름의 교향을 연주한다.

햇빛은 북소리다.
대기 전체를 울리는 드럼의 리듬.
광합성은 곧 햇빛의 박동이며,
초록 잎은 그 비트를 따라 춤춘다.
들판의 식물들은 햇빛의 열기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빛이 곧 시간이고, 시간은 음표다.

비가 오기 전,
공기는 팽팽해지고,
번개가 먼 하늘을 가르며 한 줄기 심벌즈처럼 터진다.
천둥은 베이스다.
지하의 동맥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낮고 깊은 음.
그리고 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
비는 현악기다.
지붕을 두드리고, 나뭇잎을 건드리고,
잠시 땅 위에 퍼져
서서히 사라진다.
소리의 끝은 다시 침묵이 아니라,
다음 박자의 예고다.

논둑길을 걷는 바람,
무성한 잎새를 가르는 숨결,
뜨겁지만 단정한 공기의 흐름.
여름의 자연은 언제나 동시다발적이다.
과잉의 음향 속에서도,
질서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소리가 많을수록
고요는 깊어진다.

매미 소리에 묻혀도
풀벌레는 낮은음으로 지분을 지킨다.
이파리 하나 흔들리지 않아도
그 안에서 벌은 제 율법대로 날갯짓을 한다.
여름은 누구도 침묵하지 않는 계절이다.
모든 존재가,
자신만의 박자와 음색을 가지고
지금 여기를 노래한다.

여름의 음악은
뜨겁다.
불같은 생명의 진동이 모든 구석에 배어 있다.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제된 리듬, 숨겨진 여백,
그리고 끝없는 순환이 숨어 있다.

빛이 불타고 매미가 울 때,
세계는 가장 격렬한 악장에 접어든다.
그러나 그 절정 속에도,
자연은 어김없이 조율되고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소리를 내고,
그 소리들이 하나의 악보를 만든다.





가을




낙엽이 떨어지면 바람은 독백한다




한낮의 빛이 낮아지고,
바람이 귀를 쓰다듬는 온도도 달라진다.
소리는 높이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고,
시간은 속도를 늦추며
깊은숨을 쉬기 시작한다.
가을은 시작부터 잦아든다.
모든 생명이 저마다의 음량을 줄이고,
하나둘씩 조용히 물러선다.

낙엽이 진다.
먼저 떨어지는 것은 색이고,
그다음은 무게다.
잎은 저마다 단풍이라는 마지막 음표를 달고,
공중에서 한 바퀴 원을 그린 후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앉는다.
그 마른 낙엽 위로 바람이 지나가면
길 위에서 피아노의 건반을 눌러놓은 듯
사각사각, 소리가 시작된다.
이제 자연은 말을 줄이고
독백을 시작한다.

바람은 혼잣말처럼 분다.
여름의 뜨거운 리듬이 빠져나간 자리에
바람은 조심스레 속삭임을 깔아놓는다.
갈대숲을 지나며 내는 그 소리는
숨죽인 첼로 같다.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되짚는 것처럼
몸을 기울인다.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면
밤의 문장이 펼쳐진다.
낮은음, 그러나 분명한 톤.
마치 침묵 속에 박힌 작은 바늘처럼
그 소리는 어둠을 꿰어간다.
귀뚜라미는 가을의 시인이다.
울음은 길지 않지만
그 여운은 멀리 퍼진다.

열매는 떨어지고,
곡식은 고개를 숙인다.
그 모든 동작에는 소리가 있다.
떨어지는 감 하나의 충격,
벼이삭이 기울며 낳는 가벼운 마찰음,
이 계절의 음악은
소리라기보다
기억의 반향이다.

가을의 악보는 쉼표로 가득하다.
대화를 줄이고,
느릿한 몸짓을 허락하며,
한 음 한 음 사이에
침묵을 길게 둔다.
그래서 가을은 고요하지만
비어 있지 않다.
그 여백에
사람은 생각을 담고,
자연은 순환의 예고를 새긴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길게 머문다.
햇살은 부드럽고
소리는 멀리까지 미친다.
지나가는 바람은 말하듯이 흐르고,
마당 한켠 작은 종이 바람결에 흔들리면
그 울림은 오래된 그리움 하나를 깨운다.

가을,
낙엽이 떨어지면
바람은 노래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독백한다.







겨울





침묵 속에서 얼음은 느리게 노래한다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하늘은 낮아지고, 바람은 색을 잃고,
들판은 소리 없이 엎드린다.
그러나 겨울은 결코 무음無音이 아니다.
다만, 그 소리는
너무 느려서 귀로는 들을 수 없고,
너무 깊어서 마음으로만 느껴진다.
겨울의 음악은
가장 섬세한 이들의 청각 안에서만 울린다.

첫눈이 내릴 때,
하늘은 입을 다문 채 모든 말을 접어둔다.
눈송이는 무음의 음표.
공기 중에 흩날리며 하얀 침묵을 꽂아 넣는다.
잎을 다 떨어낸 나뭇가지 위로,
마당을 지나 처마 끝으로,
소리 없이 쌓이는 그 풍경은
하얀 악보다.
누구도 쓰지 않았지만,
모든 존재가 알고 있는 겨울의 파장.

얼음은 느리게 노래한다.
밤새 얼어붙은 물웅덩이가
햇살에 조금씩 금이 갈 때,
그 금은 틈이 아니라 선율이다.
금이 가는 소리는
한겨울의 바닥에서 솟아오른 숨결이며,
모든 고요 속에서도
무언가 살아 있다는 신호다.
얼음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얼음 속에서 기다림이 자라고 있다.

겨울숲의 나무들은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잎 없이, 색 없이,
가장 본질적인 선과 구조만 남긴 채
차가운 공기 속에 서 있다.
그 뼈대 같은 실루엣은
침묵의 관현악단.
말하지 않고, 울리지 않지만
서 있는 것만으로
하나의 음이 된다.

귀뚜라미는 숨고,
새들은 떠났다.
그러나 눈 속 어딘가
남아 있는 작은 생명들은
더 조용히, 더 짧게
자신의 음을 토해낸다.
들리지 않더라도
그 생명은 지금 이 순간도 연주되고 있다.
그것은 오래된 피아노의 페달처럼
발끝으로만 느껴지는 진동이다.

난로 속 장작불이 사각거린다.
그 소리는 여름의 나무가 남긴 마지막 숨.
한 겹씩 타들어가며,
한 음씩 낮아지는 그 불의 울림은
모닥불의 독백이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겨울은 더 이상 차갑지 않다.
그것은 덜어냄이 아니라
지켜냄의 음악이다.

겨울은
모든 것을 감추지만
실은 모든 것을 준비한다.
소리를 덮고,
움직임을 묶고,
생명을 쉬게 하며
다시 올봄의 전주를 천천히 조율한다.

그래서 겨울의 악보는
지금이 아니라
곧 올 것들을 위한 연습이다.
그 침묵의 길목에서
얼음은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자연의 심장을 대신해
노래하고 있다.







ㅡ 청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청람의 사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