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청람의 사계 3
봄
■ 입춘의 틈에서 봄이 피어난다
겨울의 입김이 아직 남아 있는 새벽.
서걱거리던 나뭇가지 끝에
연분홍 꽃눈 하나, 조용히 봉오리를 연다.
장살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은
겨우내 닫혔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인사.
창밖에서 들리는 종달새의 고운 울음은
겨울을 닫고 봄을 여는 첫 번째 노래다.
물처럼 흐르는 차 한 잔의 온기,
그 곁에 흐르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세상은 아직 조용하지만,
봄은 숨결처럼 느껴진다.
여름
■ 장마의 틈에서 여름이 흐른다
봄비가 닿던 마지막 창틀은 아직 젖어 있다.
젖은 유리창 너머, 첫울음을 터뜨린 박새 한 마리.
푸른 잎사귀를 헤치고 날아든 소리가
새벽을 여는 성가처럼 들린다.
햇살은 아직 잠결이다.
장살 틈새로 한 뼘쯤 내려앉은 빛은
누군가의 꿈을 어루만지는 손처럼 부드럽다.
그 틈을 따라
베란다 위로 퍼지는 커피 향은
마음속 오래된 기억 하나를 조용히 데운다.
비발디의 사계가 턴테이블 위를 돈다.
그 음표들이 물방울처럼 떨어져
새벽 공기 속을 여름처럼 적신다.
봄은 비로 씻기고,
여름은 음악으로 흐른다.
가을
■ 낙엽의 틈에서 가을이 스민다
살구잎 하나 바람에 실려
창틈으로 살짝 스며든다.
창밖은 노란 숨결로 물들고,
고요한 공기 속에
참새 한 마리가 낙엽을 쪼아 읽는다.
볕이 낮게 비추는 오후,
베란다 끝에 놓인 묵은 책들 사이
귓가를 스치는 쇼팽의 녹턴처럼
가을은 고요하고도 선명하다.
차분히 내리는 햇살을 따라
마음도 느리게 걷는다.
가을은 늘 멀리서부터 스며드는 계절.
느낌은 메마르지만, 감정은 더 풍성해진다.
겨울
■ 동짓달 틈에서 겨울이 앉는다
서릿발 선 창살 틈새로
하얀 입김이 느릿이 스민다.
벌써 모든 색이 잠들고,
박새마저 발코니 난간에 침묵으로 앉았다.
커피보다 더 짙은 고요가
찻잔 위로 김을 피운다.
선율 없이 흐르는 공간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가
혼자 말처럼 스민다.
계절이 언 땅을 덮으며
모든 사라짐을 위한 준비를 한다.
겨울은 멈춤이 아니라
다시 피어나기 위한 깊은숨.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