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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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그릇의 미학
― 고요는 가장 단단한 충만이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텅 비워 있으면 남에게 아름답고, 내게는 고요하다. 이 짧은 문장은 단지 한 줄의 경구가 아니다. 이는 삶의 깊은 자리에서 솟아오른 한 시대의 자각이며, 존재를 대하는 가장 고요한 자세다. 현대인의 삶은 무엇인가를 채우는 데 급급하다. 지식과 재물, 명예와 관계, 심지어는 슬픔마저도 누적의 방식으로 안에 들인다. 그러나 삶은 결코 채움으로만 충만해지지 않는다. 때로는 ‘비움’이야말로 가장 단단한 중심을 만드는 시작이 된다.
비어 있는 그릇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이미 가득 찬 그릇은 더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텅 빈 공간은 타인의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용기이며, 삶의 여백은 다른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자리를 의미한다. ‘남에게 아름답다’는 말은 바로 이 포용의 상태를 말한다. 자기 자신으로 꽉 찬 사람보다, 조용히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이 더 곱게 느껴지는 법이다. 강한 주장은 소리를 지르지만, 깊은 사람은 조용히 존재한다.
문학적 관점에서 ‘텅 빈 상태’는 언제나 강한 상징성을 지녔다. 그것은 고요한 수면 위를 떠도는 작은 배와 같고, 구름이 지나간 후의 투명한 하늘이며, 낙엽이 다 떨어진 겨울의 나무다. 이들은 비어 있음으로써 가장 완전한 모습을 갖춘다. 군더더기 없는 그 자태 속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고요의 무게가 서려 있다.
‘내게는 고요하다’는 말에는 단순한 정적을 넘어선 정신적 명상이 담겨 있다. 고요는 감정이 가라앉은 평면이 아니다. 고요는 오히려 가장 많은 것을 품은 상태이며, 가장 치열한 내면이 끝내 도달한 평화의 지점이다. 세속의 소란이 다 지나가고, 혼자의 밤을 여러 번 견딘 자만이 만나는 내적 평온. 그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형의 질서이며, 세상과 화해한 이들의 얼굴에 비치는 미소와 같다.
청자 한 점을 생각해 보라. 그 담담한 곡선, 과장 없는 색감, 말없이 놓여 있는 그릇 하나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여운을 남기는지. 청자는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내면이 비워진 사람은 남의 말을 잘 듣는다. 자신의 아픔을 내세우지 않기에 남의 아픔을 더 깊이 껴안을 수 있다. 텅 빈 마음은 차가운 것이 아니라, 가장 따뜻한 공간이다. 그 안엔 판단이 없고, 속단도 없다.
비워야만 들을 수 있고, 비워야만 볼 수 있다. 고요는 감각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시인은 말한다. “말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시가 된다.” 말은 가릴 수 있어도 침묵은 결코 거짓이 없다. 그리하여 고요는 가장 진실한 언어이며, 인간의 영혼이 스스로를 회복하는 자리다.
이 시대는 비어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텅 빈 방을 외롭다 말하고, 침묵하는 사람을 불편하다 여기며, 여백을 낭비라 오해한다. 그러나 정작 가장 깊은 깨달음은 혼자 있는 시간에 오고,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여백 속에서 숨 쉰다. 채우려는 욕망보다 비우는 용기가 더 어렵다. 비운다는 건 없앰이 아니라, 정화이며 되돌림이다. 삶의 본래 자리로의 회귀다.
‘텅 비워 있으면 남에게 아름답고 내게는 고요하다’는 말은 결국, 존재의 본질을 향한 선언이다. 그것은 자기를 놓아버릴 수 있는 자만이 도달하는 자유이며, 자신의 고요로 타인의 고단함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드러내는 미의 깊이다. 텅 빈 사람만이 진정한 충만을 말할 수 있다. 고요한 자만이 진실한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고요한 자리에 문학이 깃들고, 인간다움이 뿌리내린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무엇을 더 갖는가 보다 무엇을 비울 수 있는가를 되묻자. 소란한 세상의 반대말은 침묵이 아니라 고요다. 그 고요는 결코 공허가 아니라, 가장 단단한 충만이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