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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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 영인문학관에서 안혜초 원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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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랑 지금은
안혜초 시인
우리 사랑 지금은
잠들어 가도
조금씩 알게 모르게
잠들어 가도
그대와 나
어느 한쪽이라도
깨어 있으면
오뉴월의 싱그러운 햇바람으로
깨어 있으면
우리 사랑 이대로
스러지지 않아요
그대 사랑 나 먼저
하품을 하면
내 사랑이 자꾸
자꾸 흔들어 주고
내 사랑이 그대 먼저
눈을 비비면
그대 사랑 자꾸
자꾸 흔들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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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랑 지금은
― 소멸을 건너는 사랑의 숨결, 안혜초 시인의 시적 자장(磁場)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문학은 생의 결을 따라 걷는 이의 그림자다.
그 그림자가 언어의 결로 스며들 때,
한 편의 시는 한 사람의 철학이 되고,
한 사람의 철학은 결국 한 시대의 정서가 된다.
안혜초 시인의 『우리 사랑 지금은』은 바로 그런 시다.
이 시는 늙음이라는 숙연한 시간의 언저리에서
사랑이라는 고요한 불꽃을 다시 응시하는
지혜의 기록이며, 동시에
그 불꽃이 식지 않도록 한 쌍의 숨결이 서로를 흔들어 깨우는 정감의 시학이다.
“우리 사랑 지금은 / 잠들어 가도”라는 첫 구절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다가오는 감정의 저녁 무렵을 닮아 있다.
사랑이 뜨겁지 않아도, 사랑이 말로 고백되지 않아도,
시인은 사랑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믿는다.
그것은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으려는 의지의 숨결이다.
“그대와 나 / 어느 한쪽이라도 깨어 있으면”
이 대목은 이 시의 심장이다.
사랑이란 동시에 깨어 있어야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깨어 있음이 다른 이를 다시 깨운다는 깊은 신뢰에 있다.
이런 관점은 안 시인의 전 생애에 흐르는 윤리이자 문학적 미의식이다.
상대를 기다려주고, 대신 깨어 있고, 서로의 하품을 눈치채며
조용히 흔들어 주는 사랑.
그것은 격정이 아닌 연민의 언어, 배려의 리듬, 그리고 여운의 미학이다.
안혜초 시인은 80년 삶의 굴곡을 지나
문학과 언론의 자갈밭을 걸어온 강인한 여성 지성이었다.
그녀의 문장은 신문기자 시절의 정제된 문법 위에,
시인으로서의 감성적 투명성을 덧입히며
날카로움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이중음계를 이룬다.
이 시에서도 그녀는 사랑을 낭만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외려 사랑을 생존의 감각, 생의 지속을 위한 서로의 증폭기로 다룬다.
“하품을 하면 / 자꾸 흔들어 주고”
“눈을 비비면 / 자꾸 흔들어 줘서”
이 단순한 반복 속에 깃든 사랑의 메타포는,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의 바람이 되어
다시 숨 쉬게 만드는 존재 간의 상호호흡을 암시한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을 흔들고
세월은 붙잡을 수 없지만, 눈빛을 흐리게 한다.
그러나 사랑은 그 모든 무형의 것들 사이에서
끝까지 깨어 있으려는 의지로 남는다.
이 시는 그 의지의 기록이며, 익은 사랑이 어떻게 아름답게 지속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시인의 해답이다.
요컨대, 『우리 사랑 지금은』은
사랑이 식는다는 것의 다른 이름이 ‘잠듦’이라면,
그 사랑을 되살리는 가장 고요한 손길은
서로의 눈꺼풀을 흔들어주는 마음의 인연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혜초 시인이 살아온 한평생의 윤리적 리듬과 닮아 있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깨닫는다.
진짜 사랑은 젊음의 심장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원로의 눈빛에서 다시 타오르는 것임을.
그 시선 하나로, 우리는 아직도 세상이 충분히 따뜻할 수 있음을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안혜초 시인이 문학으로 남긴
가장 부드럽고 강인한 자취이자,
청람이 감히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는
‘삶과 사랑의 품격’이다.
안혜초 시인의 망중한
김왕식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