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철학은 머리에 남지 않고, 발끝에서 드러난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동양철학은 늘 조용했다.
그것은 삶을 꾸짖거나 판단하는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고요한 숲의 바람처럼, 다만 그 옆을 함께 걸어주며 묻는다. "너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세상의 속도에 휘둘릴 때, 삶의 무게에 주저앉을 때, 동양철학은 단호한 명령보다 느리고 부드러운 시선을 건넨다. 어쩌면 철학이란 그런 것이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숨결 가까운 데 머물러 있는 것.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기계처럼 되지 않는다.”(君子不器)
이 말은 단순히 기술이나 기능을 부정한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고정된 형식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로 삶을 대하는 자의 정신적 태도를 가리킨다. ‘기(器)’란 어떤 용도에 따라 쓰임이 한정된 그릇, 혹은 기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불기(不器)는 단순한 도구적 인간을 거부하는 철학이다.
군자란, 어떤 기능을 잘 수행하는 사람을 넘어, 시대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고 변주할 줄 아는 존재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정된 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묻고, 유연하게 반응하며, 필요에 따라 자신을 바꾸는 용기다. 다시 말해, 군자불기는 '고정관념을 넘어서려는 태도'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의 철학은 제도보다 관계를, 규범보다 마음을 우선했다.
맹자는 그 뜻을 이어받아 인간의 본성에 선함이 깃들어 있음을 굳게 믿었다. 그가 말한 네 가지 마음, 즉 측은지심과 수오지심, 사양지심과 시비지심은 오늘날까지도 인간됨의 가장 깊은 윤리적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세상은 관계의 틈이 벌어지고, 본성의 선함을 증명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정답보다 속도, 품격보다 결과가 우선되는 현실 속에서 유가(儒家)의 철학은 한없이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느림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균형이다. 공맹의 철학은 뿌리처럼 삶의 기초를 다진다. 그 뿌리가 없다면, 흔들리지 않을 줄기로는 자랄 수 없다.
반면, 노자와 장자는 ‘흘러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가장 좋은 삶은 물처럼 사는 것이라 했다. 물은 다투지 않고, 낮은 곳을 택하며,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노자의 철학은 단순한 탈욕의 메시지가 아니다. 그것은 인위적 질서를 내려놓고, 존재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라는 권유다. 현대의 번잡함과 과잉 속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은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면서 동시에 가장 시급한 지혜이기도 하다.
장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의 경계를 허문다. 나와 너, 옳고 그름, 성공과 실패. 모든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 존재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이야기처럼, 나비가 내가 된 것인지, 내가 나비가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순간에서 그는 말한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흐르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우리는 종종 철학을 머리로만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삶은 이마로 사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생각이 아니라 발끝에서 드러난다. 걸음의 속도, 말의 높낮이, 관계의 거리, 물러설 줄 아는 한 발자국. 그것이 철학이다. 우리가 배우고 사유하는 모든 개념은 결국 한 사람의 태도와 실천으로 귀결되어야 비로소 살아 있는 철학이 된다.
동양철학을 삶에 녹이는 일은, 나를 완전히 바꾸는 일이 아니다. 다만 물이 물을 만나듯, 내가 나를 마주하는 일이다. 그 안에서 나는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따뜻해지고,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철학은 머리에 남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젖어들어야 비로소 철학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