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허만길 선생님과 최현배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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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배 선생은 허만길의 스승이었고,
허만길 선생은 나의 스승이다.
영등포구 신길1동에 거주하면서 영등포여자고등학교 교사, 경복고등학교 교사, 영원중학교 교장, 당곡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허만길 문학박사(시인)가 <월간 신문예> 2021년 7•8월호(서울)에 초대수필로 실은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 박사와의 만남’이 큰 화제를 낳고 있다. 17쪽에 걸친 회고 형식의 수필인데,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허만길 박사는 1960년 진주사범학교 3학년 재학 중 17살에 국가시행 중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에 응시하여 수석합격으로 18살에 국어과 중학교교원자격증을 받았다. 그리고 1962년 19살에 국가시행 고등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에 응시하여 수석합격으로 국어과 고등학교교원자격증을 받았다.
중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 및 고등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는 1차 전공과목 학력고사(필기시험)에 합격하면 2차 구술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학력고사 출제위원이 구술시험도 담당하였다. 허만길 박사는 중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 응시 때는 중학교 졸업장밖에 없었으므로, 학력고사에서 전공과목 국어과뿐만 아니라 공통과목으로서 교육학과 사회과목(정치, 경제, 법률, 사회, 문화, 교양 등 종합) 시험도 치르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서 실지수업 시험도 치러야 했다. 중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의 학력고사 및 구술시험 출제위원은 김형규 서울대학교 교수와 홍웅선 문교부 학무국장이었으며, 고등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 학력고사 및 구술시험 출제위원은 최현배 한글학회 이사장과 김형규 서울대학교 교수였다.
최현배 박사가 허만길 박사에 대하여 알게 된 계기는 허만길 박사가 1962년 3월 최현배 박사에게 학회 활동에 관한 문의를 서신으로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허만길 박사는 최현배 박사로부터 1962년 3월 26일 자로 쓴 편지를 3월 28일에 받았다. 허만길 박사를 서울 자택으로 초대하는 내용이었다. 그때 허만길 박사는 19살이었으며, 부산중앙초등학교 교사였다. 었다. 허만길은 어린 버드나무를 한 아름 안고 최 박사와 함께 큰길로 나갔다. 대흥극장과 철길이 있는 곳이었다. 길가에 버드나무들을 심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네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일요일인지라 그냥 놀러 나온 아이들이었다. 최 박사는 아이들에게 이제 심은 버드나무들을 몇 그루씩 배당해 주었다.
“이 나무는 너의 것이야. 네가 주인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각자에게 맡겨진 나무들을 잘 자라게 하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달리아와 홍초 뿌리를 나무상자에 가득 담아 이웃 가게에 주면서 이를 팔든지 나누어 주든지 하라고 했다.
아침 식사 후 허만길은 사모님의 안내로 서울 구경을 하기 위해 자가용에 탔다.
“허 군, 서울에 와서 공부하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최 박사의 간곡한 말에 허만길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창경원 구경을 하고, 혜화동에 있는 맏아드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덕수궁 구경을 한 뒤 오후 4시 부산행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이 뒤로 허만길은 최 박사뿐만 아니라, 최 박사의 가족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해(1962년) 여름 최 박사의 엽서를 받은 허만길은 8월 3일 부산 근처 일광해수욕장에서 최 박사, 최 박사의 친손자와 외손자, 안호상 철학박사, 최 박사의 제자인 부산고등학교 추월영 교장과 함께 만났다. 최 박사는 허만길에게 부산에서 야간 대학을 마치고 나면 대학원은 서울에서 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미국 유학지원 제의에 가정형편상 사양 후에도 깊은 사제관계
1963년 10월 29일에는 최 박사의 내외분이 부산을 거쳐 고향 울산으로 가는 길에 최 박사는 허만길이 근무하는 부산중앙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최 박사는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가끔 특강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허만길을 찾았다. 허만길이 불면증을 겪고 있을 때 최 박사는 1964년 4월 9일 국제시장에 허만길을 데리고 나가 지아민과 핵사비타민을 사 주면서, 광복동 거리의 약방을 다니면서 불면증에 듣는 약을 알아보아 주기도 했다.
허만길이 1966년 7월 16일 한글학회부산지회 주최로 부산여자고등학교에서 연구 발표를 할 때 최 박사는 찬조 강연을 하였다. 1967년 최 박사는 허만길의 결혼 살림을 보기 위해 부산고등학교 추월영 교장과 함께 부산 초량동 셋방에서 허만길의 장모님이 장만한 생선국을 들면서 매우 맛나다고 했다.
허만길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로 재직한 뒤 교원채용순위고사를 거쳐, 1967년 11월 23일(24살) 서울 영등포여자고등학교 교사로 발령받고서는 최 박사를 자주 뵙게 되었다.
그런데 1970년 3월 23일, 허만길은 출근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면서 ‘동양방송’(TBC) 라디오에서 나오는 아침 8시 뉴스를 듣다가 크게 놀랐다.
“외솔 최현배 선생이 세브란스병원 별관 524호실에서 오늘 새벽 3시 35분경 별세했습니다.”
최 박사는 1894년 10월 19일에 태어났으니, 76살 되는 해에 돌아가신 것이다.
허만길은 9시 50분경 세브란스 병원 별관 524호실에 들어섰다.
“선생님 …….” 하고, 허만길은 그만 목이 메었다.
국무회의에서는 최 박사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기로 가결하였다. 산소는 최 박사가 생전에 원한 대로 주시경 선생의 묘소와 가까운 곳으로 정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양지바른 곳이었다. 3월 27일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영결식이 있었다. 허만길은 장례지도위원석에 앉았다. 최 박사의 영정(초상화)이 생전처럼 허만길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허만길은 새해 첫날 세배를 드렸을 때, 최 박사가 날씨가 풀리면 허만길의 집에 와 보겠다면서 약도까지 물었던 일이 생각났다. 허만길은 몇 사람과 함께 최 박사의 널을 영구차로 모신 뒤, 한글학회 직원 2명과 함께 정부의 문화공보부에서 내 준 차를 타고 행렬의 맨 앞장을 섰다. 영구차는 오후 3시경 장지에 도착했다. 장지에까지 조문객 700여 명이 따랐다.
하관이 끝나고 상주들은 먼저 서울로 가고, 허만길은 뒷일의 진행을 보고서 오후 6시경 서울로 출발했다.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걸어오면서 최 박사가 손 저으며 전송해 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는 자꾸만 되돌아보았다.
“스승님, 편안히 쉬십시오.”라고 되풀이하면서, 고마웠던 일들을 곰곰 되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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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길 선생님이 걸어온 길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석사. 홍익대학교 문학박사(국문학과). 시인. 소설가. 1971년 복합문학 창시 및 첫 장편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 ‘ 출판(1980년). 17살 진주사범학교 학생회위원장 겸 학도호국단운영위원장으로서 진주의 4.19 혁명 앞장. 1990년 정신대(일본군위안부) 문제 최초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 발표. 1990년 중앙교육연수원 장학사로서 교원국외연수단을 인솔하여 아무 표적 없는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자리를 찾아 현장 즉흥시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자리’를 읊고 귀국 후 임시정부자리 보존운동 성과. 문교부 국어과 편수관. 교육부 국제교육진흥원 강사.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해외동포용 ‘한국어’ 교재개발 연구위원. 학술원 국어연구소 표준어 사정위원.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사전’ 집필위원. 국제 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한글학회 회원. ▲저서: ‘한국현대국어정책 연구’. ‘우리말 사랑의 길을 열면서’. ‘정신대 문제 제기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자리 보존운동회고’. 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 시집 ‘아침 강가에서’. 수필집 ‘진리를 찾아 이상을 찾아’. 장편소설 ‘천사 요레나와의 사랑’ 등 ▲노래 작사: ‘백두산 바라보며’. ‘우정의 자리’. ‘여의도 꽃길’. ‘한강샛강다리’, ‘서울메낙골공원’, ‘진주 비봉산’. ‘해운대 달밤’. ‘의령 아리랑’. ‘내 아내여서 행복이네’ , '우리 자연 우리 환경' 등 20여 편□
ㅡ 출전, 영등포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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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보다 먼저 돋아난 등불의 기억
ㅡ스승 허만길 선생님께 드리는 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한 시대의 고요한 서재를 만나는 일이다. 나는 허만길 선생님 안에서 그런 서재를 만났다. 그곳엔 묵은 책의 향기와 낡은 연필의 굳은 심지, 그리고 검박한 하루하루가 단정히 꽂혀 있었다.
경복고등학교의 교실. 칠판 앞에 젊은 국어 선생이 있다. 낡은 양복 단벌이었지만, 그 옷자락 안엔 무너지지 않는 언어의 기둥이 서 있었다.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소매와 주머니가 해질 때마다 선생님은 조용히 바늘을 들어 꿰매셨다. 그 실밥 하나하나에 깃든 품위는, 아무리 새 옷을 걸친 이들도 흉내 낼 수 없는 지식인의 고전美였다.
학생들은 그분을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단벌옷의 시인 백결처럼, 허만길 선생님은 옷보다 말을 다듬는 데 정성을 쏟으셨고, 옷보다 마음을 꿰매는 데 바늘을 드셨다.
그분의 수업은 교과서보다 깊었고, 문법보다 따뜻했다. 허 선생님은 칠판에 적은 문장보다, 그 문장을 말하는 목소리의 결이 더 중요함을 알려주셨다. 나는 법대를 향하던 나침반을 스스로 꺾고, 국문과로 걸어갔다. 내 인생의 방향이 바뀐 것은 설득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분은 결코 '가르친다'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다만 '살아내셨다'. 단정한 머리, 맑은 눈빛, 간결한 문장, 책을 넘길 때마다 스며드는 잔잔한 손끝의 움직임. 그것이 곧 교육이었다. 말보다 행동이, 지식보다 겸양이 앞섰던 그 삶은, 내게 가장 확실한 교과서였다. 나는 그 교과서를 껴안은 채 시인이 되었고, 수필가가 되었으며, 문학평론가로서 걷고 있다. 그 길의 밑줄은 모두 허 선생님이 그으신 것이다.
17세에 중등교원자격고시 수석, 19세에 고등학교 교원자격 수석. 하지만 이 전설적 수치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분이 외솔 최현배 박사의 손을 잡고 서울의 아이들과 함께 버드나무를 심으며 “이 나무는 네 것이란다”라 말씀하신 장면이다. 그 말속에는, 교육이란 씨앗을 심고 기다리는 일임을 아는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철학이 담겨 있었다. 허만길 선생님은 외솔의 뜻을 이어받아, 그 나무들이 언젠가 숲이 되기를 믿으며 자신의 옷보다 아이들의 정신을 꿰매고 또 꿰매셨다.
서울 오산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나는 그분이 남긴 교육의 손길을 아이들에게 건넨다. 나의 수업은 허만길 선생님 앞에서 익힌 '품격의 언어'를 물려주는 시간이다. 책상 위에는 국어책보다도, 허 선생님이 남긴 한 문장의 떨림이 먼저 펼쳐진다.
복합문학을 창시하고, 임시정부 자리를 보존하고자 홀로 상하이 거리를 헤매셨던 일.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문학에 담고, 골목과 강가를 노래로 바꾸시던 일. 그 모든 기록은 단지 업적이 아니라, 시대의 혼을 언어로 건져 올린 한 지식인의 생애였다. 그 생애는 비단옷이 아니라, 꿰맨 자락의 단정함으로 빛났다.
나는 한 분의 스승만을 가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문장 하나를 쓸 때마다 그분의 단정한 어깨가 떠오른다. 문장을 고르다 막힐 때, 나는 그분의 실밥 같은 한마디를 떠올린다. "왕식 군, 사람의 말은 먼저 마음에서 꿰매야지."
세브란스 병원 524호실. 외솔 선생의 별세 소식을 듣고, 목메어 “선생님……”이라 부르시던 허 선생님의 모습이 내게는 아직 생생하다. 오늘은 그 음성을 빌려, 내게 유일한 스승께 조용히 인사를 올린다.
“스승님…… 선생님께서 꿰매신 말의 자락이 지금 제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단벌 양복의 바느질 자국처럼, 당신의 품격이 제 글마다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스승이 남긴 언어의 길 위를 걷는다. 낡은 옷 하나를 꿰매며, 사람의 마음까지 수놓을 수 있던 백결 같은 스승. 그 이름 앞에 나도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2025년 5월 30일
제자 김왕식 드림
경복고교 국어 교사 허만길 서생님
경복고등학교 졸업 당시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