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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다는 말의 슬픔ㅡ 김왕식

김왕식









사랑했다는 말의 슬픔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랑하다”의 반대말은 “사랑했다”라는 말은 시처럼 짧고, 철학처럼 깊다. 우리는 흔히 사랑의 반대말을 ‘미움’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미움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뜨거운 감정이 차갑게 돌변했다 해도, 그 안에는 여전히 감정의 잔열이 남아 있다. 진정한 반대는 ‘과거형’이 되는 것이다. “사랑했다”는 말은, 더 이상 그 감정이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자, 시간에게 넘겨준 감정의 유서다.

“사랑했다”는 말에는 묘한 슬픔이 배어 있다. 그것은 누군가를 뜨겁게 품었다는 기억과, 지금은 그 품이 비어 있다는 공허함이 동시에 깃든 말이다. 과거형이 된 사랑은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 사랑은 언젠가 웃었고, 설렜고, 함께 꿈꿨지만 이제는 서로 다른 풍경 속에 놓여 있다. ‘사랑하다’가 생명의 언어라면, ‘사랑했다’는 추억의 언어다. 그것은 박제된 감정이며, 시간이 무덤을 덮은 기억이다.

“사랑했다”는 말은 또한 불가역의 감정을 상징한다. 한 번 과거가 된 사랑은 다시 현재형으로 돌아오기 어렵다. 회복보다 회고가 앞서며, 바람보다 바람이 앞서는 상태다. 그래서 “사랑했다”는 말은 누군가를 놓아준 사람의 체념이자, 붙잡지 않기로 한 마지막 배려이기도 하다. 그 말에는 더는 기대하지 않겠다는 침묵이 있고,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 불쑥 피어오르는 그리움을 말없이 누르는 절제가 있다.

한때의 ‘사랑하다’는 말이 ‘사랑했다’로 바뀌는 데는 큰소리가 필요하지 않다. 별일 없이도 변해버린 감정,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서늘한 거리, 눈빛 한 줄기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단절. 언어로 드러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 순간을 안다. 말보다 먼저 마음이 과거형이 되는 그 순간, 사랑은 이제 더는 현재에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했다”는 말만큼 순수했던 감정을 고스란히 품은 말도 없다. 그 속에는 소중했기에 놓아야 했던 수많은 장면이 들어 있다. 사랑했던 사람은 지워지는 대상이 아니라, 생의 일부가 된다. “사랑했다”는 말은 잊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잊지 못했음을, 다만 더 이상 그 감정으로 살 수 없음을 말하는 진술이다.

그러니 “사랑했다”는 말은 차가운 말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간직한 이들의 조용한 존엄이고, 사랑이 끝났어도 품위는 남겨두고 싶은 이의 마지막 문장이다. ‘미움’이 관계의 파열음이라면, ‘사랑했다’는 말은 관계의 끝에서 꺼내는 인사에 가깝다. 덜어낸 감정, 간직한 기억, 그리고 놓아야 할 사람에게 건네는 이별의 리본이다.

사랑의 반대말이 ‘사랑했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란 지금 이 순간 하지 않으면 곧 사라져 버리는, 유일하게 현재형만이 진짜인 감정이라고. 그리고 언젠가 사랑이 과거형이 되더라도, 그것은 결코 실패가 아닌, 한 시절 삶이 아름다웠음을 증명하는 문장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했고, 또 언젠가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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