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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를 청람 김왕식 평하다

김왕식











성북동 비둘기




시인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산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월간문학>(1968년 11월호)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를
청람 김왕식 평하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는 한 마리 새의 비상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신적 고향이 무너지는 소리를 담은 내면의 비가(悲歌)이다. 그는 한 마리 비둘기를 통해 인간성과 자연, 그리고 사상의 안식처가 점점 사라져 가는 문명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그려낸다.

시의 첫 행에서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는 역설은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삶의 뿌리를 잃어가는 존재들의 아픔을 간결하게 압축해 낸다. 인간 중심의 문명이 공간을 확장할수록 비둘기와 같은 순전한 생명들은 외려 번지를 잃는다. 존재의 토대가 붕괴되는 아이러니는 시인의 현실 인식이자 문명비판의 시작이다.

비둘기는 더 이상 평화의 상징이 아니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은 자연에 대한 폭력이고, 그 진동은 곧 비둘기의 ‘가슴에 금이’ 가는 내상의 메타포다. 그러나 시인은 절망 속에서도 비둘기가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을 도는 모습을 통해 마지막까지 희망의 궤적을 놓지 않는다. 하늘을 나는 그 행위는 현실을 부정하는 탈출이 아닌, 여전히 축복을 나누려는 숭고한 의지다.

산의 메마름과 ‘채석장 포성’은 현대 자본이 삶의 심층을 얼마나 척박하게 만드는지를 드러낸다. 비둘기는 피난하듯 사람들의 지붕 위를 떠돌며, 이제 ‘금방 따낸 돌의 온기’에서조차 위안을 구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구절은 단순한 서정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이 겨우 돌의 체온에 기대는 현실을 드러내며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마지막 연은 이 시가 가진 철학적 깊이를 완성한다. 시인은 비둘기의 상징을 통해 인간성의 상실을 성찰한다. 비둘기가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게 되었다는 선언은 단순한 동물의 불운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상실한 정신적 자산을 고발하는 목소리다.

김광섭 시인의 시학은 단정하고 절제된 언어로 존재의 본질을 묻는 데 있다. 「성북동 비둘기」는 그 시학의 정점에 선 작품이다. 시인은 특정 지역과 존재를 노래하면서도, 그 안에 보편적 인간 조건의 비극과 연민을 담아낸다. 언어는 슬픔을 과장하지 않고, 현실은 피하지 않으며, 진실은 애정의 눈으로 관조된다.

이 시는 단지 성북동이라는 공간에 대한 서정이 아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자연, 고요, 그리고 평화라는 가치에 대한 문명비평이며, 쫓기는 새의 비상을 통해 우리 시대의 길 잃은 존재들을 되묻게 하는 고품격의 서정철학이다.
김광섭은 비둘기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디에 깃들고 있는가, 당신은 누구와 더불어 평화를 나누는가.
그 물음의 여운은 지금도 성북동 하늘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다.



ㅡ 청람 김왕식

김광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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