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허태기 삶의 회귀와 시간의 성찰

김왕식


청강 허태기 시인










강변 단상(江邊 斷想)



시인 청강 허태기




바람은 신선하고
강물은 시원하다

세월을 거스르면

할머니의 인자한 목소리
바람 되어 귓가를 어루만지고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 물결 되어 흐른다

아버지의 모습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모래톱 서성이는 백로
어머니의 외로운 마음인가

상념의 돛을 띄운 강
노을 속에 흩어진다.





시인 허태기 삶의 회귀와 시간의 성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청강 허태기 시인의 「강변 단상」은 강가를 거닐던 일상적 풍경을 통해,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내면 여행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 시는 ‘바람’과 ‘강물’이라는 자연의 두 요소로 문을 여는데, 이 초기 설정이 가진 담백함이 곧이어 펼쳐질 깊은 사유의 장을 예비한다.

“바람은 신선하고 / 강물은 시원하다”라는 두 줄은 폭이 넓은 담론을 담기보다, 시적 감성의 바탕이 되는 단순한 정서적 공감대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 시의 힘이다. 일상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한순간의 호흡이지만, 그 속에 삶의 기억이 멈춰 서게 하는 결정적 에너지로 작동한다.

다음 연에서 시인은 “세월을 거스르면”이라는 구절로 문을 열어, 강가 풍경을 시간의 흐름이 아닌 과거와의 대화 지점으로 재구성한다. 할머니의 목소리, 할아버지의 주름, 아버지의 형상, 어머니의 외로움까지, 강변의 모든 것이 시인의 기억 속 가족의 얼굴로 투영된다.
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자연이 가족의 자취를 은유하는 업(業)의 풍경화이다. 모든 연령층의 얼굴이 자연과 하나 되어 흐른다는 것은 결국 “자연이 곧 시간”이며 “기억이 곧 물결”이라는 시인의 철학적 인식이 아닐까.

허태기 시인의 미의식은 매우 조심스럽고 섬세하다. 강가의 백로는 단순한 새가 아니다. “모래톱 서성이는 백로 / 어머니의 외로운 마음인가”라는 물음조차 허용하는 태도 속에는, 자연과 사람이 지닌 공통의 정서와 외로움이 교차한다.
이 은유는 시의 맥을 ‘회상’에서 ‘공감’으로 완성하며, 강변 풍경은 곧 가족의 내면이 된다.

마지막 연, “상념의 돛을 띄운 강 / 노을 속에 흩어진다.”에서, 시인은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간, 기억과 시간의 경계를 허무는 미의 통찰을 드러낸다. ‘돛을 띄운 강’은 목적 없는 항해 같지만, 관조자 내면의 깊은 사유이자,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떠나는 은유적 여정이다.
노을 속에 흩어진다는 말은 결국 모든 것이 강 위에서 다시 흩어지고 소멸하더라도, 시인의 순간은 그곳에서 충만해진다는 종결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청강 허태기 시인은 “강변”이라는 단순한 풍경을 텅 비운 화면처럼 내어주되, 그 안에 가족과 시간, 기억과 정서의 미묘한 밀도와 울림을 담아냈다. 바람과 물, 백로와 노을이 시인의 내면과 겹쳐지면서, 시는 곧 하나의 삶의 경전처럼 읽힌다.
시인의 가치철학은 인간과 자연, 기억과 존재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엮는 순환적 세계관에 자리 잡고 있다.

“세월을 거스른다”는 한 문장이 시의 전제이며, 곧 “잊히는 것이 아니라 돌아보는 것이 삶이다”라는 시인의 인식이기도 하다.
회상을 통해 상처받고 깃들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연 속에서 발견하고, 노을 속에 녹여 가는 이 시는, 그 자체로 삶의 회복이자 기억의 재생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론적 성찰이다.

청강 허태기 시인의 「강변 단상」은 삶과 시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문학적 경계를 넘는 고요한 울림의 시편이다. 그저 계절의 풍경이 아니라, 영혼의 풍경, 시인의 묵상과 기억이 고요히 자리 잡은 대문 없는 성소이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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