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길 선생님과 제자 청람 김왕식
■
스승의 손을 다시 잡다
― 허만길 선생님께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반세기가 흘렀습니다.
1975년, 경복고등학교 교실 앞 칠판 옆에서 늘 따뜻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시던 허만길 선생님.
그 시절의 나는 아직 문장과 삶 사이를 헤매던 풋소년이었고, 선생님은 언어라는 숲의 입구를 조용히 열어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2025년 초여름.
한국청람문학회 창간호를 준비하며 오래도록 잊지 못한 이름을 조심스레 꺼냈습니다.
“허만길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다면...”
그 소망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창간호의 발간사와 대표 시를 선생님께 부탁드렸고, 선생님은 망설임 없이 응해주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마침내, 선생님을 직접 뵙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오랜 세월의 결이 묻어난 얼굴, 그러나 그 미소는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 교정 꾀꼬리 동산의 느티나무 사이를 거닐던 그때의 모습 그대로 제 앞에 서 계셨습니다.
“얘야, 잘 지냈느냐”
그 한마디에 무너질 듯 북받쳤던 감정, 나는 애써 눈물을 삼켰습니다.
선생님께 드릴 한국청람문학회 창간호를 품에 안고 조심스레 건넸습니다.
첫 장엔 선생님의 발간사가, 중간엔 대표 시가, 마지막엔 선생님을 위한 헌정의 마음이 정성껏 담겨 있었습니다.
책장을 넘기시던 선생님의 눈빛이 잠시 멈추었습니다.
말없이 웃으시더니, “이 나이에 이런 귀한 대접을 받는구나.”
그 말 한 줄에, 나는 더는 숨길 수 없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선생님은 그날도 섬세하셨고, 날카로우셨으며, 무엇보다 따뜻하셨습니다.
마치 50년 전, 한 문장에 담긴 뜻을 짚어주실 때처럼.
수업 시간마다 문장의 호흡과 삶의 결을 가르쳐주셨던 그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날의 만남은 단지 ‘재회’가 아니라 ‘귀환’이었습니다.
다시 스승 앞에 선 제자,
그 자리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했습니다.
이별의 시간이 가까워오자, 선생님은 조용히 흰 봉투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이건 그냥 내 마음이다. 고맙다.”
그 안엔 금일봉이 들어 있었지만,
그보다 더 따뜻했던 것은 선생님의 손길, 그리고 그 마음이었습니다.
어느새 손을 잡고 있었고, 눈빛을 주고받았고, 발걸음을 떼지 못했습니다.
멀어지는 순간까지 우리는 몇 번이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서 말도 잊고, 그저 손짓만 반복했습니다.
그 순간, 속으로 속삭였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선생님, 참 고맙습니다.”
문장을 가르쳐주셨던 그 시절에도,
살아 있는 예술로 당신을 뵈었던 오늘도,
선생님은 늘 저의 인생 책 첫 장에 머무는 분입니다.
□
나의 유일한 스승, 허만길 선생님.
그 오랜 시간에도, 제자를 기억해 주시고
당신의 문학과 사랑으로 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의 만남은 한 편의 시가 되어,
제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오래도록 머무를 것입니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