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미 75년 전에 지불했습니다

김왕식



□ 필리핀 한국전쟁 참전용사








당신은 이미 75년 전에 지불했습니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역사의 길 위에는 빛나는 길도 있고 어두운 길도 있다. 그러나 가장 밝게 빛나는 길은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지난 세월의 발자국을 돌아보며 오늘을 감사히 살아간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필리핀 참전용사의 길은 유독 마음을 뜨겁게 하는 발자국이다.

1950년, 한국이 전쟁의 참혹함에 휩싸였을 때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도움의 손길이 닿았다. 그 손길은 단지 물질적 지원이나 외교적 성명만이 아니라, 젊은 청춘과 목숨을 내놓은 진정한 희생이었다.
특히 필리핀은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지상군을 파견하여 한국 땅에서 피와 땀을 흘렸다. 그들은 한국의 자유를 위해 자신들의 젊음과 생명을 기꺼이 바쳤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의 한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

이제 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어느덧 75년, 전쟁에 참여했던 필리핀 참전용사 할아버지는 93세가 되었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선명히 간직한 채 자신이 한국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용기는 빛을 발하고, 역사의 깊은 뿌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세월은 참전용사의 육신을 늙게 하고, 삶의 환경을 열악하게 만들었다. 그런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한국의 봉사단이 할아버지의 댁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열악한 생활환경을 마주하고 가슴이 아팠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엄을 지켜드리고 싶어 화장실 설치를 제안했다. 하지만 필리핀의 참전용사 할아버지는 단호히 손사래를 치며 이를 극구 사양했다. 오히려 자신이 그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순간 봉사단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이 일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미 오래전에 충분히 지불된 그 값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봉사단은 존경과 감사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당신은 이미 75년 전에 충분히 지불하셨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는 우리가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한국과 필리핀을 잇는 오랜 세월의 강 위에 깊은 감사와 존중의 다리가 놓였다.
그 다리는 단지 물질적인 지원이 아니라 인간적인 품격과 진심 어린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풍요와 평화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귀한 헌신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며, 다음 세대에게도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기념비를 세우는 일만이 아니다. 살아남은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지원하는 것이며, 그들이 지켜준 가치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참전용사 할아버지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런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은 역사의 시간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감사의 마음으로 다시 피어난다. 그들에게 우리가 돌려줄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은 바로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그 기억이 살아있을 때 우리는 더욱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참전용사 할아버지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75년 전 당신이 지불한 그 값은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서 빛날 것이다. 그 빛 아래에서 우리는 오늘도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

당신은 이미, 오래전에 충분히 지불하셨다.
이제 그 빛을 지키고 전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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