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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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그림자
시인 청강 허태기
잔잔한 호수 햇살
비키면
산자락은 영혼처럼
무겁게 가라앉고
숲은 푸른 그림자를
드리운다
부질없는 생각
호수 속으로 침잠하고
비운 마음자리
백조 한 마리
활짝 편 날개로 호수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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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 허태기 시인의 작품「물 그림자」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청강 허태기 시인의 작품 「물그림자」는 간결하고 정갈한 시적 언어로 내면의 고요와 성찰을 그려낸 서정적 작품이다.
허태기 시인은 평소 애국애족의 마음을 뜨겁게 품고 살아온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펜 끝에서 피어난 많은 작품이 민족과 역사를 아우르며 뜨거운 열정과 저항정신을 담았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한층 섬세하고 맑은 마음결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맑은 호수 위로 드리운 물그림자처럼 시인의 내면 또한 순백의 투명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시는 크게 두 개의 이미지로 나누어진다. 처음에 드러나는 호수의 잔잔한 수면과 그 위로 내려앉는 산자락과 숲의 그림자는 고요하고도 묵직한 명상의 공간이다.
"잔잔한 호수 햇살 비키면 산자락은 영혼처럼 무겁게 가라앉고 숲은 푸른 그림자를 드리운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서 존재의 깊은 성찰을 유도한다. 산자락이 마치 영혼처럼 호수 속으로 가라앉는다는 표현은 삶의 무게와 숙명적인 인간 존재의 본질을 함축한다. 또한 숲이 호수에 드리우는 푸른 그림자는 생명의 신비와 더불어 시인의 내면적 세계, 그가 가진 맑고 깊은 감성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러한 묘사는 허태기 시인이 평생 견지해 온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민족의 역사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시대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짊어지며 살아왔다. 그의 삶 자체가 마치 산자락처럼 무겁고, 숲처럼 풍요롭게 민족의 그림자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 시에서는 깊은 내면의 성찰을 통해 무겁고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되 그것을 맑고 순수한 감성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두 번째 이미지인 백조 한 마리는 이 작품의 핵심적인 중심 이미지로 볼 수 있다. "부질없는 생각 호수 속으로 침잠하고 비운 마음자리 백조 한 마리 활짝 편 날개로 호수를 깨운다." 이 표현은 앞선 무거운 이미지에서 벗어나 순수하고 맑은 내면의 열림을 상징한다. 백조는 전통적으로 순결과 순수를 상징하며, 활짝 펴진 날개는 억압과 어둠 속에서도 끊임없이 희망과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정신의 승화를 의미한다.
이 작품에서 허태기 시인이 보여주는 미의식은 명징한 투명성이다. 그는 화려하거나 장식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가장 담백하고 간결한 표현을 통해 깊은 울림과 여운을 남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서정성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철학적 성찰로 나아간다. 백조가 수면 위로 날아오를 때의 고요한 파동처럼, 그의 시는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면 깊숙이 퍼지는 강력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허태기 시인의 시적 철학은 삶을 비우고 내면의 본질을 바라보는 '비움'과 '성찰'의 미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애국애족의 열정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명상의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그리하여 그는 삶의 무게와 세속의 번뇌를 내려놓고, 순수한 정신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가 독자에게 주는 깊고 은은한 감동의 이유다.
「물그림자」는 바로 이러한 시인의 가치관과 작품 미학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시이다. 마치 물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그의 시는 투명한 수면 위에 비친 또 하나의 현실이다. 그 현실은 무겁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결코 흐려지지 않는 순백의 마음이며, 세상의 모든 번잡함과 욕망을 내려놓고 비운 자리에 피어난 고귀한 정신의 모습이다.
허태기 시인은 평생 동안 시대와 민족을 위하여 뜨겁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마치 고요한 호수처럼 평화로운 내면의 상태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허태기 시인의 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는, 바쁘고 소란한 현대인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깊은 사색과 고요한 성찰의 시간을 선물한다. 그것이야말로 허태기 시인이 평생 지켜온 순수와 진실의 가치이며, 우리 마음에 오래도록 잔잔한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