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ㅡ 시인 박노해
□ 박노해 시인
■
사랑은 끝이 없다네
시인 박노해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시간이 흘러서도
그대가 내 가슴속을 걸어 다니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강을 건너서도
그대가 내 가슴에 등불로 환하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대 이름만 떠올라도
푸드득, 한 순간에 날아오르겠는가
그 겨울 새벽길에
하얗게 쓰러진 나를 어루만지던
너의 눈물
너의 기도
너의 입맞춤
눈보라 얼음산을 함께 떨며 넘었던
뜨거운 그 숨결이 이렇게도 생생한데
어떻게 사랑이 끝이 있겠는가
별로 타오른 우리의 사랑을
이제 너는 잊었다 해도
이제 너는 지워버렸다 해도
내 가슴에 그대로 피어나는
눈부신 그 얼굴 그 눈물의 너까지는
어찌 지금의 네 것이 되겠는가
그 많은 세월이 흘러서도
가만히 눈 감으면
상처 난 내 가슴은 따뜻해지고
지친 내 안에선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해맑은 소년의 까치걸음이 날 울리는데
어찌 사랑에 끝이 있겠는가
사랑은 끝이 없다네
다시 길 떠나는 이 걸음도
슬픔으로 길어 올린 이 투혼도
나이가 들고
눈물이 마르고
다시 내 앞에 죽음이 온다 해도
사랑은 끝이 없다네
나에게 사랑은
한계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패배도 없고
사랑은 늘 처음처럼
사랑은 언제나 시작만 있는 것
사랑은 끝이 없다네
■
끝을 넘어 시작되는 노래
— 박노해 시인의 「사랑은 끝이 없다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ㅡ박노해 시인의 「사랑은 끝이 없다네」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울림을 담은 시다. 단순한 연정의 고백을 넘어, 이 시는 시대의 고통을 살아온 한 사내가 몸으로 겪고 꿰뚫어 본 ‘사랑’의 진실에 대한 선언이며, 생을 관통한 시인의 신념이자 투혼이다.
“사랑은 끝이 없다네”라는 반복구는 단지 감성적인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뚫고 나아간 언어의 항거이자, 인간 존엄에 대한 궁극의 경의다.
시는 처음부터 선언적으로 시작한다. “사랑에 끝이 있다면”이라는 가정법은 곧바로 부정당한다. 시인은 기억의 시간을 소환하며 사랑의 존재를 확증한다. “그 많은 시간이 흘러서도”, “그 많은 강을 건너서도”, “그대 이름만 떠올라도” 여전히 가슴속에 살아있는 사랑. 이 대목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감정의 지속성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사랑이야말로 인간 삶의 변치 않는 중심임을 웅변한다.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닌, 한 사람의 존재를 다시 세우고, 그 사람의 내면에 잊히지 않는 등불로 남는 생명의 흔적이라는 것.
중반부에 이르러 시는 더욱 실존적인 기억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그 겨울 새벽길에” 시작되는 구절은, 시인의 삶의 궤적을 함께한 한 인물의 온기, 즉 '너의 눈물', '너의 기도', '너의 입맞춤'을 통해 살아남은 인간의 숨결을 그린다. 박노해의 삶은 고통과 투쟁, 감시와 추방의 연속이었다. 그 잔혹한 시절 속에서 이 시인이 간직해 온 따뜻한 숨결은 단순한 연인의 추억이 아닌, 인간적 연대와 기억의 불씨였다. 그러기에 이 사랑은 누군가의 배신이나 망각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그대가 지웠다 해도’ 피어나는 사랑은 곧 시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재생산되는 인간 존엄의 꽃이다.
이 시에서 눈에 띄는 중요한 미학적 장치는 ‘반복’이다. “사랑은 끝이 없다네”라는 구절이 시 전체를 관통하며, 일종의 성가이자 기도문처럼 울려 퍼진다.
이것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시인의 ‘사랑관’을 드러내는 리듬이며, 독자에게 진실을 각인시키는 영혼의 북소리다. 그 울림 속에 담긴 의미는 단순히 감정의 지속성을 넘어서, 생을 지탱하는 윤리의 원천으로서의 사랑이다.
“나에게 사랑은 / 한계도 없고 / 머무름도 없고 / 패배도 없고”라는 말에서 우리는 시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사랑은 시인에게 구속이 아니라 해방이며, 패배가 아니라 회복이다. 그것은 감정의 결과물이 아니라, 존재의 태도이며 시작 그 자체다. “사랑은 언제나 시작만 있는 것”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끝을 상정하는 세상의 상식에 대한 반기이며, 영원히 초발심으로 살아가려는 시인의 다짐이다.
박노해는 오랜 감옥의 시간을 견디며도 결코 미움을 품지 않았다. 그는 투쟁의 길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 사랑은 추상적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 생생한 기억, 체온과 눈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 시의 사랑은 자기희생이나 미화가 아니라 ‘살아 있음’ 그 자체에 대한 깊은 경의다. 사랑은 생명이며, 사람이며, 기억이며, 존재 그 자체다.
이 시는 결국 박노해의 삶의 철학이 응축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늘 “사람”을 말했고,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 속에는 한 존재를 향한, 끝나지 않는 ‘사랑’이 있었다. 사랑이 끝난다고 말하는 시대에, 박노해는 말한다. 사랑은 끝이 없다고. 아니, 사랑은 오히려 끝이 없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하여, 이 시는 지나간 사랑의 애틋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박노해라는 시인이 일생 동안 품어온 뜨거운 신념이자, 지금도 계속 쓰고 있는 한 편의 인간 선언문이다. 그리고 이 시는, 잊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단 하나의 이름,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조용히 되새기게 만든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