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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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를 넣을 때마다 나는 쇼팽을 듣는다
최호 안길근
트럭의 기어봉을 잡을 때면, 나는 건반 위의 손을 떠올린다. 쇼팽의 피아노 선율처럼, 부드럽게, 그러나 정확하게. 기어를 넣고 출발할 땐 *프렐류드, 언덕길을 오를 땐 발라드, 그리고 고속도로에 올라 속도를 낼 땐 *폴로네이즈. 내 손은 운전대를 잡고 있지만, 마음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흐름은 강물처럼 삶을 적신다. 나에게 음악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보다, 트럭이 내는 소음 속에서 들린다. 디젤 엔진의 낮은음, 깜빡이의 간헐적 리듬, 브레이크가 멈출 때 나는 쉼표 같은 마찰음. 세상은 끊임없이 연주되고 있고, 나는 그 속에서 악보 없이 즉흥 연주를 하는 중이다.
쇼팽은 평생 고독을 음악으로 버텼다고 한다. 나라를 잃은 유랑민이었고, 병든 몸을 안고도 끝까지 피아노 앞을 지켰다. 그 절박함이 곡마다 스며 있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매일 먼 길을 달리며, 나 또한 소리를 버텨야 할 때가 많다. 엔진의 떨림이 하루 종일 등뼈를 타고 올라오고, 길 위의 정적이 귀를 울릴 때면, 나도 모르게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삶을 붙잡기 위해, 음악을 떠올린다.
기어를 넣는 순간, 삶이 전환된다. 후진은 회한의 선율이고, 일단 기어를 중립에 둘 때는 침묵의 간주다. 그리고 다시 전진기어를 넣을 때, 나는 마음속에서 쇼팽의 ‘혁명’이 흐르길 빈다. 그 음악처럼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나는 길을 나선다.
나는 악보를 볼 줄 모르지만, 마음의 귀로 음표를 듣는다. 낮에는 민요처럼 구수한 햇살, 밤에는 재즈처럼 고독한 가로등, 새벽에는 클래식처럼 조용히 깨어나는 마을. 트럭 창밖의 세상은 늘 장르를 바꿔가며 내게 말을 건다. 음악은 사치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가장 고요한 무기다.
언젠가, 길 위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들 때, 라디오에서 ‘녹턴’이 흘러나왔다. 피아노가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 소리는 무언가를 위로하지 않았고, 격려하지도 않았다. 다만, 함께 있어주었다. 나는 그저, 음악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눈시울이 젖었다. 트럭 안은 콘서트홀이었다. 나만의 청중, 나만의 연주자.
나는 음악가가 아니다. 그러나 내 하루엔 음악이 있다. 클러치의 감각은 박자이고, 핸들의 움직임은 선율이며, 나의 시선은 악보의 줄 위를 따라간다. 쇼팽은 말했단다. “음악은 침묵 뒤에 오는 가장 고귀한 소리”라고. 그 말을 곱씹을수록, 나는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침묵도 음악의 일부이므로.
노동이란 리듬이다. 일정한 속도로 반복되는 손동작, 호흡, 그리고 기다림. 나는 그것을 느낀다. 하역장에 서서 짐을 내릴 때, 엘리베이터처럼 오르내리는 동작 속에도 박자가 있다. 음악이 없는 노동은 견디기 힘들지만, 마음의 리듬을 붙들면 모든 고단함도 견딜 수 있다.
나는 트럭을 몰며 삶을 연주한다. 악기가 없지만 리듬이 있고, 무대는 없지만 여운이 있다. 기어를 넣는 순간마다, 나는 새로운 곡을 시작한다. 그리고 언젠가 이 생이 끝날 때, 내 하루하루가 한 편의 교향곡이 되길 바란다.
* 프렐류드 ㅡ 17세기 후반부터 헨델, 바흐 따위의 모음곡에서 푸가, 토카타 따위와 조합한 도입부의 곡. 그 후 독립된 소기악곡으로 작곡되기에 이르렀다.
*폴로네이즈ㅡ19세기에 유행한 느린 폴란드 춤. 또는 그 춤곡
□ 안길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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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젤 엔진 위에 흐르는 쇼팽의 서정
― 최호 안길근 수필 「기어를 넣을 때마다 나는 쇼팽을 듣는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최호 안길근의 수필 '기어를 넣을 때마다 나는 쇼팽을 듣는다'는 일상의 노동과 고전 음악의 교차지점에서 빚어낸 한 편의 서정시이며, 트럭운전사라는 직업의 물리적 현실을 음악이라는 미학의 언어로 승화한 수작이다. 이는 단순히 감성적 몽상에 머무는 글이 아니라, 육체노동의 현장 한복판에서 탄생한 실존의 문장들이며, 소음 속에서 아름다움을 길어 올리는 존재적 통찰이 담긴 글이다.
수필은 ‘기어봉을 잡는 손’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손은 단순히 기계의 레버를 조작하는 기능적 손이 아니라, 쇼팽의 건반을 짚는 피아니스트의 손과 겹쳐진다. 이 비유는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다. 작가는 여기서 ‘삶을 다루는 태도’와 ‘노동의 품격’을 선언한다. 트럭의 기어가 변속될 때마다 쇼팽의 프렐류드, 발라드, 폴로네이즈가 흐른다는 진술은, 단조롭고 피로한 노동의 행위조차도 예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묵직한 인문학적 성찰이다.
작품의 미의식은 ‘보이지 않는 음악’에 있다. 디젤 엔진 소음, 깜빡이 리듬, 브레이크 마찰음까지도 그는 ‘음의 조각’으로 해석한다. 이는 도시와 도로, 정적과 소음, 분주함과 고요함 사이에서 음악을 발견하려는 존재의 태도이며, ‘노동하는 인간이 감각하는 세계는 무미건조한 풍경이 아니라, 하나의 교향곡’이라는 미학적 신념을 드러낸다. 특히 “나는 악보를 볼 줄 모르지만, 마음의 귀로 음표를 듣는다”는 문장은 그 전체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구절이다. 작가는 곧 음악가가 아니어도, 음악을 살 수 있고, 살아내는 삶이 곧 연주가 될 수 있다는 인간적 품격의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이 수필은 삶의 고단함을 감상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엔진의 떨림이 등뼈를 타고 올라오고, 정적이 귀를 울릴 때”라는 구절처럼, 노동의 현실적 육중함을 정직하게 기술하면서, 그 안에 예술의 리듬을 심는다. 쇼팽이 유랑과 질병 속에서 피아노를 놓지 않았던 것처럼, 작가도 무대가 없는 트럭 안에서 스스로를 ‘나만의 청중, 나만의 연주자’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주체성은 자기 노동의 존엄을 지켜내는 창조적 태도이며, 한국 사회에서 종종 ‘노동=기능’으로 환원되는 인식을 통렬히 반박하는 문학적 발언이기도 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문장은 더욱 깊은 사색으로 번져간다. “노동이란 리듬이다”라는 선언에서, 노동을 하나의 고통이 아니라 ‘예술적 질서’로 환원시킨다. 반복되는 하역의 동작, 클러치의 박자, 핸들의 선율까지를 감각하는 그의 시선은, 노동하는 인간에게도 ‘침묵 이후의 고귀한 소리’가 있음을 증명한다. 쇼팽의 명언 “음악은 침묵 뒤에 오는 가장 고귀한 소리”는, 그의 노동 또한 ‘고귀한 침묵’ 이후 도래하는 삶의 예술임을 상징하는 말로, 수필의 종지부를 우아하게 맺는다.
최호 안길근의 이 수필은 ‘운전하는 자의 철학’이자, ‘노동하는 자의 음악’이다. 고단함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기 위한 고요한 의지, 리듬을 통해 삶을 통제하려는 절제된 태도,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성찰이 한 편의 음악처럼 감미롭게 흐른다. 그는 결국 말한다. “나는 트럭을 몰며 삶을 연주한다.” 이 문장은 곧 그의 인생관이며, 수필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고귀한 화음이다.
이 수필을 읽는 독자라면, 트럭의 기어봉을 조작하는 손끝에도 클래식이 흐를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 글이 가진 진정한 품격이자 감동이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