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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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의 이빨 아래서
김왕식
태양이 칼날처럼 내리 꽂힌다
대지의 숨구멍이 다물어지고
풀잎은 혀처럼 말라붙는다
나무는 말을 줄인다
그늘조차 자신의 체온을 감춘 채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킨다
나는 한 줌의 바람에게 묻는다
어찌 이 열기를 견디는지
그는 말없이 골목 어귀를 돌아 사라진다
얼음물 대신 묵언을 마시고
부채 대신 마음을 접는다
덥다고 말하는 순간
덥지 않은 구석이 모두 사라진다
폭염은 삶의 급소를 누른다
그러나 나는 저항하지 않는다
가만히 허리를 낮추고
햇살의 이빨 아래 등을 내어준다
이 여름은 내게 묻는다
뜨겁게 살아본 적이 있느냐고
그 물음에 대답하려
나는 땀을 흘린다, 침묵으로
해가 기울 무렵
가장 낮은 곳에서 물기가 되살아난다
폭염 속 순응은 패배가 아니라
천천히 익어가는 하나의 의식
불덩이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존재가 있다
그것이 나이기를,
오늘도 나는 숨을 아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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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식 시인의 시『폭염에 순응하는 법
– 숨결까지 숙여 쓰는 시의 미학
문학평론가 김기량
김왕식 시인의 시 「폭염에 순응하는 법」은 자연의 극한 조건인 '폭염'을 단순한 계절적 배경이 아닌 존재론적 물음의 무대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이 시는 더위라는 물리적 현상 속에 내재한 인간 삶의 본질을 응시하며, 시인이 그 무더위 앞에서 취한 태도가 곧 인간의 '살아내는 방식'과 직결됨을 보여준다. 뜨거운 시절, 뜨겁게 살아본 자만이 쓸 수 있는 고요한 철학의 시라 하겠다.
시인은 서두에서 "태양이 칼날처럼 내리 꽂힌다"라고 쓴다. 햇빛은 더 이상 온기나 생명의 은총이 아니라, 삶의 급소를 찌르는 무장된 폭력이다. 이어지는 표현 "대지의 숨구멍이 다물어지고 / 풀잎은 혀처럼 말라붙는다"는 묘사는 인간이 호흡하는 생명의 기반이 막히는 순간을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여기서 '혀'라는 메타포는 특히 인상 깊다. 생명의 언어, 소통의 통로조차도 무력화되는 순간, 침묵의 질감은 더없이 두텁게 다가온다.
중반부로 들어서며 시인은 인간의 저항 본능을 거슬러 '묵언과 순응'을 선택한다. 얼음물 대신 '묵언을 마시고', 부채 대신 '마음을 접는다'는 구절은 그야말로 물리적 더위를 이겨내는 도구를 버리고, 내면적 수양의 태도로 현실을 마주하는 결기를 보여준다. 특히 "덥다고 말하는 순간 / 덥지 않은 구석이 모두 사라진다"는 부분은 언어의 소환이 어떻게 감각을 지배하는지를 날카롭게 포착한 부분이다. 말은 현실을 끌어당기고, 때로는 고통을 증폭시킨다. 그러므로 침묵은 곧 저항이자 구원이다.
이 시의 백미는 "폭염은 삶의 급소를 누른다 / 그러나 나는 저항하지 않는다"에서 나타난다. 시인은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몸을 낮추고 햇살의 '이빨' 아래 등을 내어주는 '순응'을 택한다. 그것은 체념도 포기도 아니다. 시인은 이 뜨거운 시간을 통해 "뜨겁게 살아본 적이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여름은 단순한 계절이 아니라, 살아온 삶의 강도를 가늠하는 은유이며, 시인은 그 질문에 '땀을 흘리는 침묵'으로 답한다. 이 땀은 육체의 수분이 아니라, 고요하게 응결된 정신의 결정이다.
결말부에서 "해가 기울 무렵 / 가장 낮은 곳에서 물기가 되살아난다"는 시구는 인간 삶의 진실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침묵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깨달음의 언어다. "폭염 속 순응은 패배가 아니라 / 천천히 익어가는 하나의 의식"이라는 진술은 이 시 전체의 철학을 압축한 선언이다. 여기서 ‘의식’은 단순한 자각이 아닌, 삶을 받아들이고 천천히 몸에 새겨가는 하나의 수행이다.
김왕식 시인의 시는 언제나 낮고 깊은 데서 출발한다. 그는 삶을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인간을 응시하며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숨결을 잡아낸다. 「폭염에 순응하는 법」 역시 그러하다. 이 시는 시끄럽게 외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존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고 있으며, 폭염을 견디는 일상의 자세에서 존재의 고고함을 끌어올린다.
김왕식 시인의 미학은 바로 그 '숨을 아끼는 고요함' 속에 있다. 언어를 절제하고 감각을 정제하며, 거친 세상을 향해 부드럽게 자신을 내맡긴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읽는 이를 한 걸음 멈추게 하고, 뜨거운 바깥세상 앞에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이 시가 지닌 온도는 뜨거움이 아니라, 그 뜨거움을 견딘 뒤 찾아오는 내면의 미풍이다.
그 온도 앞에서 우리는, 오늘도 조용히 숨을 고르게 된다.
ㅡ 김기량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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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아래서 피어난 두 꽃, 김왕식 시인과 김기량 평론가께 드리는 글
ㅡ 김철삼(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객원교수)
두 분의 글을 읽고 나니, 이 더운 여름날 제 마음속에도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갑니다.
김왕식 시인께서는 “햇살의 이빨”이라는 놀라운 비유로 폭염을 그려내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계절의 더위가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 마주하는 극한의 조건들이며, 그것 앞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서야 하는지를 묻는 시였습니다. 땀 흘림이란 생존의 문제일 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진지한 응답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침묵과 절제된 언어로 전달하셨습니다. ‘얼음물 대신 묵언을 마시고’라는 구절에선 저는 문득 수도자의 침묵과 노동을 떠올렸고, ‘햇살의 이빨 아래 등을 내어주는’ 그 장면에선 세상의 거친 이물감마저 받아들이는 순결한 수용의 미학을 느꼈습니다. 시인 특유의 고요한 겸허함이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시를 평론가 김기량 선생께서 더욱 깊고 넓게 풀어주셨습니다. 시인의 문장을 언어로 다시 길어 올리되, 사유의 두레박이 닿는 깊이는 철학의 영역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저는 평론의 본질이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시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시에 담긴 감응의 결을 확대해 주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김 평론가께서는 이 시의 미학을 ‘순응의 윤리’와 ‘내면의 수행’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짚어내셨지요. 그 분석은 시인의 삶의 태도와 작품 세계를 꿰뚫은 통찰이자, 독자로 하여금 시의 본령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만든 고품격 안내서였습니다. 특히 “숨을 아끼는 고요함”이라는 표현은 시인의 시학을 이토록 정확하고 품위 있게 규정할 수 있는가 싶어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두 분의 글을 읽으며 저는 문학이 경제학과는 전혀 다른 자리에서, 그러나 인간에 대해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경제는 선택의 학문이고, 문학은 성찰의 학문입니다. 폭염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면,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국, 우리 내면의 성숙으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시인은 ‘폭염에 순응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결코 무력한 수동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단단한 자기 확신이며, 가장 깊은 성찰이었습니다.
이 시대, 삶의 각축장 속에서도 문학은 이렇게 여전히 사람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문학의 길목에서 시를 쓰고, 그 시를 읽고 풀어내는 두 분이 계시기에
독자인 저도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뜨거운 계절이 끝날 무렵
두 분의 언어가 남긴 울림은
아마도 제 마음 한 켠에 오래도록 그늘이 되어 남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김철삼 드림.
□ 김왕식 시인